양양 지역의 사지 및 근·현대사찰

사림사 선림원지(寺林寺 禪林院址) - (3)사명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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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69회 작성일 2024-02-16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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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명에 대한 고찰


선림원지(禪林院址)의 사명에 대하여는 논란의 여지가 있어 살펴보기로 한다.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사찰의 명칭에 대하여 중국 당나라 때에는 사(寺)와 원(院)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였으나, 그 이후 사(寺)는 사찰 전체를 가리키는 어휘로, 원(院)은 사찰 내에 있는 특정한 기능의 별사(別舍) 즉 강원(講院)  등을 지칭할 때 사용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를 받아들여 사용하였다.

지금의 선림원지는 명칭상 문제의 소지가 많이 남아있음에도 선림원지(禪林院址)로 고착되어 가고 있는 현실에 대하여 우려를 표하며 사림사(沙林寺)선림원으로 바로잡히길 바란다. 

지난 1948년 이 절터에서 출토된 신라범종(新羅梵鐘)의 내부 명문(銘文) 중에는 해당 사찰명이 아닌 약칭(略稱)으로 ‘당사(當寺)’ 즉 이 절로 표기하였다〔貞元卄年甲申三月卄三日當寺鐘成內之,  정원 20년 갑신(804)  3월 23일에 당사의 종이 이루어지다〕또한 명문(銘文) 중에‘이 절의 옛 종 쇠 이백이십정(當寺古鍾金二百卄廷)’을 밑천 삼음이라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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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산지 사림사 : 지금은 없어졌다. 기묘년에 주민이 낭떠러지에서 쇠사발과 대나무를 얻었는데 조금도 상하지않았다고 한다. (자료:규장각한국학연구원)

 

 

범종의 명문(銘文)에‘당사(當寺)’라고 표기되었기 때문에 이 절은 선림원(禪林院)이 아니라 사(寺)였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홍각선사가 함통 말년(870)에 이곳 억성사(億聖寺)로 다시 들어와 머물면서 퇴락한 절의 금당과 누대를 대대적으로 중창하였다는 기록을 보면 당시는 억성사였음이 확인된다. 

억성사(億聖寺)는 우리나라 초기 선종사(禪宗史)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신라 하대의 사찰이었다. 남종선(南宗禪)은 우리나라에 헌덕왕(809~826년)대에 처음 전래 된 후에 가지산파의 초조(初組)인 도의선사(道義禪師)의 법을 이어받은 염거화상(廉居和尙)이 이 절에 주석하였으며, 가지산문의 실질적인 개창주(開創主)인 체징(體澄)은 억성사에서 염거로부터 심인(心印)을 전해 받았다. 또한 홍각선사 이관(利觀)은 이곳에 머물며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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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조 양양부사의 명암집‘현산삼십영’사림단비의 사림사와 홍각(자료:국립중앙도서관)

 

 

그러나 이곳 사찰의 이름이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여지도서 고적조에 사림사비, 관동지 고적조에 사림사비, 관동읍지 고적에 사림사비, 현산지 사찰조에 사림사라는 이름이 수록되어 있고, 양양부사를 지낸 명암 이해조(李海朝)가 1709년 재임 시 남긴 현산삼십영(峴山三十詠 : 양양삼십경을 읊다.)이란 시(詩)에“사림사(沙林寺)”란 기록이 있다. 또한 조선시대 대사헌을 지낸바 있는 홍경모(洪敬謨 1774~1851)의 관암전서(冠巖全書) 책27에“신라 설악산 선림원 홍각선사비는 옛날 양양의 사림사에 있었다.”고 기록함으로써 억성사(億聖寺) 이후 누군가에 의해 사림사(沙林寺)로 사명이 변경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하루빨리 억성사에서 언제 어떤 연유로 사림사가 되었는지를 알려 주는 명문이나 문헌이 나타나서 이를 뒷받침 해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