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의 역사

4. 철기시대(鐵器時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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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70회 작성일 2024-03-11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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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서 청동기의 제작이 본격화된 기원전 3세기 말경 중국 북방으로부터 새로운 문화, 즉 철기문화가 들어옴으로써 철기시대가 시작된다. 이 시기는 기원전 300년경부터 기원후 300년까지의 약 600년간에 해당되지만, 청동기시대 후기와 겹치는 기원전 300년경부터 기원전·후까지를 초기철기시대(初期鐵器時代)로,  기원전·후부터 기원후 300년까지를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로 나누어 부르고있다.

초기 철기시대는 청동기시대 후기에 중국으로부터 철제품이 들어오면서 철기의 현지 생산이 시작되는 시기로, 단단하고 예리한 철의 특성으로 인해 다양한 종류의 무기류, 농공구류가 만들어졌다. 특히 철제 농기구의 보급은 대규모의 농경을 가능케 하여 생산력을 급속히 증가시키는 등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으며, 철의 제조 공정을 수행하는 전문집단이 발생하고 철이 부(富)의 척도가 되는 등 사회적 계급 분화를 촉진시키기도 하였다. 또한 철제 무기의 출현과 농업생산력을 바탕으로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국가가 출현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철기문화는 중국에 가까운 북부지방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남부지방에서는 기원전 1세기경에 본격적으로 확산하게 되는데, 그 계기가 된 것은 중국 한(漢)문화의 유입이었다.  원삼국시대는 문헌상의 삼한시대(三韓時代),  한국사(韓國史)에서의 부족국가(部族國家), 성읍국가(城邑國家), 연맹왕국(聯盟王國)시대에 해당되며, 삼국이 고대 국가체제를 마련할 수 있었던 기틀이 된 시기이다. 철기시대의 주거생활은 청동기시대 주민들이 주로 평야나 하천과 가까운 야산이나 구릉 지대에서 취락을 이루고 살았던 것과는 달리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주로 살았던 큰 강가와 하천변의 대지나 해안가의 모래언덕에 움집을 짓고 살았다. 움집의 기본형태는 긴네모꼴로서 청동기시대와는 별 차이가 없으나 입구가 돌출된 철(凸)자형의 움집과 큰방에 입구 시설인 작은방이 딸린 여(呂)자형의 움집이 보편적으로 만들어졌다. 집 내부에는 기존의 화덕 대신에 부뚜막과 구들을 설치하여 이용하기도 하였으며, 내부의 생활공간은 더욱 확대되는 경향을 보인다. 당시의 무덤으로는 널무덤[목관묘(木棺墓)], 덧널무덤[목곽묘(木槨墓)], 독무덤[옹관묘(甕棺墓)], 돌무지무덤[적석총(積石塚)] 등이 유행하였다. 토기는 청동기시대 민무늬토기의 전통 위에 중국의 영향과 새로운 토기 제작의 기술 보급으로 검은간토기[흑도(黑陶)]와 덧띠토기[점토대토기(粘土帶土器)],  경질 민무늬토기[경질무문토기(硬質無文土器)],  두드림무늬토기[타날문토기(打捺文土器)]  등이 만들어졌으며,  한국식동검·청동거울·청동방울 등의 청동기류와 쇠칼·쇠고리칼·쇠화살촉·쇠창 등의 철제무기류,  쇠도끼·쇠삽·쇠낫 등의 철제 농공구류가 활발하게 제작되어 사용되었다.

양양지역은 초기 철기시대~원삼국시대에 이르러 함경도 해안지대와 영동지역 그리고 경북 동해안의일부 지역과 함께 동예(東濊)에 속해 있었으며, 예족(濊族)이라고 불리는 종족들이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까지 조사된 고고학 자료를 통해서 보면, 동예에 속한 예 종족의 거주영역에는 물질문화의 공통성이 드러난다. 즉 충적(沖積 : 흐르는 물에 의해 토사가 쌓임) 대지나 해안의 사구 지대에서 이른바 여자형(呂字形), 혹은 철자형(凸字形)의 평면형을 지닌 수혈주거지로 구성된 취락이 분포하며, 예족의 주민들이 사용한 토기는 중도식토기(中島式土器)로 불리는 경질무문토기(硬質無文土器)와 타날문단경호(打捺文短頸壺 : 두드림 무늬 목이 짧은 둥근 항아리)가 공존하는 특징을 보인다. 

이러한 물질문화의 공통성은『삼국지(三國志)』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의 기록에 보이는 예종족의 습속들과 함께 문화적인 정체성을 시사해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가깝게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 조에 ‘서기19년 봄 2월에 명주의 북쪽 지역[양양으로 추정] 사람이 밭을 갈다가 예왕(濊王)의 도장(옥새)을 얻어서 바쳤다.’라는 기록을 보아서도 이 시기에 양양을 중심으로 한 동해안지역의 강릉과 삼척 일대에는 예국(濊國)과 실직국(悉直國 : 삼척지역 부족국가)이 각각 존재하고 있었다. 특히 강릉의 예국고성(濊國古城)은 정치체로서 예국의 중심지였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는데, 예국고 성의 축조 및 사용 시기는 기원전·후의 시기부터 기원후 4세기 후반 혹은 5세기 초반경까지였을 가능성이 높으며, 강릉지역과 동해·삼척지역은 대체로 기원후 4세기 후반~5세기 초반 무렵에 신라화(新羅化)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양양지역이 동예의 어느 정치집단에 속해 있었는지와 고구려 혹은 신라의 동해안 진출과 관련하여 그 구체적인 문화적 전개 양상은 현재까지 파악되지 않는다. 1966년 정암리에서는 초기철기시대의 동경(銅鏡)과 동검(銅劍)이 발견되고,  1983년 가평리 주거지유적이 처음으로 조사된 이래 최근에 이르기까지 정암리, 용호리, 조산리, 가평리, 송전리, 여운포리, 동호리, 지경리 등에서 다수의 철기시대 생활유적이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중 가평리유적, 용호리유적, 지경리유적이 부분적으로 발굴조사 되었다. 지금까지 발견된 양양지역의 철기시대 유적은 모두 해안사구 지대에 입지하고 있는데, 지형상으로 소하천과 늪지, 사구와 석호, 그리고 잔구성의 나지막한 구릉이 교대되는 저지대의 환경을 이루는 곳에 분포하고 있다. 따라서 양양지역의 철기시대 취락의 분포양상과 주거지 구조를 미루어 보면, 대체로 동예의 영역에 속한 거주집단의 취락 형태와 동일한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아울러 일정한 규모의 예의 토착 집단이 거주하였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이와 관련된 철기시대 주요 유적과 유물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가. 정암리유적(釘岩里遺蹟)


1966년 강현면 정암리 일원에서 청동거울[銅鏡] 1점과 청동검[銅劍] 1점이 발견되어 당국에 신고되어 알려졌으며, 1967년 김원룡에 의해학계에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청동거울은 다뉴세문경(多紐細文鏡)이고, 청동검은 세형동검(細形銅劍)이다. 유물의 출토 경위는 자세히 알수 없으나, 대체로 초기 철기시대인 기원전 3~2세기경에 제작되어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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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리출토 동경 및 동검



나. 용호리유적(龍湖里遺蹟)


이 유적은 강현면 용호리 127번지 일원에 위치한다.  태백산맥에서 뻗어 내린 해발 25m 내외의 낮은 구릉과 해안사구가 만나는 지점에 해당한다. 유적의 동쪽으로 약 100m쯤에 설악해수욕장이 있으며, 남쪽으로 50m쯤에 저구릉에서 흘러내리는 소하천이 동해로 흘러들고, 북쪽 구릉 너머에는 작은 늪지가 있어 선사인들이 정착 생활을 하기에는 비교적 좋은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다.  2002년 강원문화재연구소에서 여관신축부지에 대한 발굴 조사한 결과, 신석기시대 야외노지 10기와 철기시대 추정 야외노지 1기가 확인되었다. 철기시대 유구인 추정 야외노지는 평면형태가 부정형으로 크기는 동-서 2m, 남-북 0.8m이다. 내부에서 경질무문토기 항아리 2점과 토기편 소량이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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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호리유적 추정 야외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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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호리유적 출토 민무늬토기



다. 가평리유적(柯坪里遺蹟)


이 유적은 손양면 가평리 산25-1번지 일원에 위치한다. 7번 국도변에서 수산리 쪽으로 약 3.5㎞ 진입하면 KBS 송신소와 강원대학교 수련원이 있고, 송신소 뒤편 북쪽으로 약 500m쯤 올라가면 저습지에 도달하는데, 이 저습지의 북쪽에 있는 해발 5m 미만의 모래언덕 일대가 철기시대의 집자리 유적이위치한 지역이다.  유적이 위치한 지역은 남대천 하류역으로, 동쪽은 동해와 접하고 서쪽은 태백산맥의 지맥이 이곳까지 도달하여 유적의 배면(背面)을 이루고 있다. 이와같이 유적이 위치한 남대천 하류역 일대는 하천, 해안, 호수, 산림 등의 천혜의 조건을 모두 갖춘 지역으로 선사인들이 생활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지역이다.

가평리유적은 1983년 강릉대학교 박물관에서 처음으로 발굴하여 초기 철기시대 철자형(凸字形) 집자리 2기가 확인되었고, 많은 양의 경질무문토기 및 타날문토기와 소량의 철편 등이 출토되었다. 집자리는 수혈 움집으로 바닥은 모두 점토를 펴서 단단하게 다졌다. 1호 집자리는 기둥구멍은 확인되지 않았으나, 크기가 길이 7.5m, 너비 7.1m이고, 면적은 53.25㎡(약 16평)이다. 2호 집자리는 길이 4.6m, 너비 4.3m이고, 면적은 19.78㎡(약 6평)이며, 불탄 숯기둥이 확인되었다. 숯기둥은 모두 진흙 바닥의 가장자리에서 약 30~50㎝ 안쪽에 위치하여 초석 없이 세워져 있다. 집자리의 동북쪽 모서리 진흙더미 속에 불 먹은 진흙과 길이 20~30㎝, 두께 5㎝ 정도의 네모진 불 맞은 돌들이 흩어져 있어 화덕자리 내지는 부뚜막시설로 보인다. 기원 전후~A.D. 2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996년 가평리‘쿵쿵산’으로 불리는 주변의 사구지대에서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의해 철기시대 여자형 (呂字形) 집자리 1기와 파괴된 집자리 2기가 발굴되었으며, 경질무문토기와 타날문토기, 흑색토기 등의 토기류와 철겸, 철도자, 철촉 등의 철제품이 출토되었다. 당시 조사된 여자형 집자리는 작은 방을 통해서 큰방으로 연결되는 구조로 바닥은 점토를 다졌으며, 기둥 자리와 화덕, 저장시설 등을 갖추었다. 기둥 자리는 내부 기둥과 외곽기둥의 이중 구조로 설치되었는데, 움집의 상부구조가 상당히 복잡한 구조였음을 시사해주고 있다. 

이러한 가옥의 구조는 주거입지가 해양성기후로 인해 바람이 많이 부는 곳에 많으며, 토양이 모래이 기 때문에 지붕을 상당히 넓게 만들어서 처마가 지표에 가깝게 하여 비나 눈에 의해 주거지 내부로 유입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저장용 대형토기와 화덕자리 부근의 토기 안에서 다량의 탄화 곡물(콩과 보리)이 출토되어 당시 주민들의 식생활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집자리의 전체 규모는 길이 10.5m, 너비 5.5m, 움 깊이 50~65㎝이다. B.C.2세기~1세기경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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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평리유적 呂자형 주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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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평리유적 출토 타날문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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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평리유적 출토 민무늬 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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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평리유적 출토 민무늬 토기



라. 지경리유적(地境里遺蹟)


이 유적은 현남면 지경리 임5-7번지 일원으로서 화상천(和尙川) 하구와 남쪽으로 접한 사구지대에위치한다. 1994년 도로공사 중에 발견되어 처음으로 알려졌으며, 1995년 강릉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주문진-양양 간 7번 국도 확장공사 구역에 대한 정식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철기시대 집자리 7기가 확인되었다.

당시 조사된 집자리는 평면형태가 철자형(凸字形) 6기, 장방형(長方形) 1기이다. 장방형 1호 주거지는 길이 28.2m, 너비 8m, 움깊이 30㎝이고, 면적은 약 225㎡(약 68평)로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조사된 선사시대 주거지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에 해당한다. 대부분의 철자형 주거지는 바닥에 진흙을 깔아 고르게 다졌으며, 화덕자리는 주로 주거지의 북쪽에 치우쳐 시설되었다. 주거지 내부에서 경질무문토기(硬質無文土器)와 타날문토기(打捺文土器) 다수가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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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경리유적 1호 주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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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경리유적 2호 주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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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날문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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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경리유적 출토 민무늬토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