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의 역사

3.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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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73회 작성일 2024-03-11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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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기간 동안 사용하였던 간석기 대신에 구리에 비소, 주석을 합금하여 만든 청동기(靑銅器)의 사용으로 인류는 새로운 문명사회로 접어들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신석기시대 말기인 기원전 2000년경에 중국의 요녕지역, 러시아의 아무르강과 연해주 지역에서 들어온 덧띠 새김무늬 토기가 앞선 빗살무늬토기 문화와 약 500년간 공존하다가 점차 청동기시대로 넘어간다. 이때가 기원전 2000년경에서 1500년경으로 한반도의 청동기시대가 본격화된다. 고인돌[지석묘(支石墓)]도 이 무렵에 나타나기 시작하여 한반도의 토착 사회를 이루게 된다. 이 시대에 청동기가 생산도구로 널리 사용되었다는 증거는 아직 없으나, 청동기는 신분 상징적인 존재로 소수의 유력자들에 한정되어 무기나 장식품으로 사용되었다. 생활 도구로는 주로 간석기나 목기, 골각기가 이용되었다.

청동기시대의 주민들은 주로 강과 하천에 가까운 평야나 야산 구릉 지대에서 취락을 이루며, 주변 골짜기를 개간하여 농사를 짓고, 네모꼴[방형(方形)]이나 긴네모꼴[장방형(長方形)]의 움집을 짓고 살았다. 움집은 신석기시대보다 움이 낮아진 반움집으로 규모가 더 커졌으며, 움집 내부의 바닥에는 돌을 돌리거나 바닥을 약간 파서 화덕을 만들었고, 집이 큰 경우에는 여러 개의 화덕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이 시대에 와서 벼농사를 비롯한 농경이 본격적으로 발달하여 이전부터 사용하던 간석기가 더욱 다양해졌다. 간석기에는 벌목이나 나무 가공에 사용된 돌도끼, 홈자귀, 돌대패날, 돌끌 등이 있고, 곡식의 이삭을 따는 데 사용된 반달돌칼, 돌낫이 있으며 땅을 파거나 밭을 일구는 데 사용된 돌보습과 돌괭이 등이 있다. 이외에도 곡물 가공에 쓰인 갈판과 갈돌이 있으며, 무기와 사냥도구로는 돌화살촉, 돌창, 돌칼, 바퀴날도끼 등이 있다.

청동시시대의 토기[민무늬토기:무문토기(無文土器)]는 이전의 신석기시대와는 달리 굵은 모래나 활석(滑石)등을 섞은 진흙으로 빚어 구운 납작한 토기로, 대개 그릇 표면에 무늬가 없으며 갈색 또는 적갈색을 띠고 있다. 일상용의 민무늬토기는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와 교체되면서 지역과 시기에 따라 그릇의 형태나 색, 만드는 방법에서 차이를 보인다.

1970년대 초반 감곡리 유물산포지(遺物散布地)와 범부리 고인돌이 확인된 이래 최근까지 포월리, 수여리, 학포리, 상양혈리, 하광정리, 조산리, 사천리, 강선리, 기정리, 밀양리, 포매리, 원포리, 지리, 임호정리, 입암리 등 비교적 많은 곳에 다수의 청동기시대 유적이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따라서청동기시대에 들어와 많은 주민들이 주요하천의 나지막한 구릉 지대를 중심으로 삶의 터전을 가꾸면서 살았음이 밝혀지게 되었으며, 아울러 일정한 규모의 토착 집단이 거주하였음을 시사해주고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청동기시대 유적으로 포월리유적, 밀양리유적, 임호정리유적, 지리유적이 발굴되었으며, 최근 영동지방 최초로 청동기시대 분묘유적인 송전리 토광묘(土壙墓 : 널무덤) 1기가 새로이 조사되었다. 청동기시대 유적은 주거지(住居址) 및 유물산포지 등의 생활유적(生活遺蹟)과 고인돌과 같은 분묘유적(墳墓遺蹟)으로 크게 구분된다.

주요 유적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가. 포월리 고인돌(浦月里支石墓)


이 고인돌은 양양읍 포월리 산59번지 일원의 나지막한 구릉 상에 3기가 위치한다. 1992년 포월리 농공단지 조성지역 내의 청동기시대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 과정에서 강릉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2기가 조사되었으며, 이와 인접한 남쪽 구릉 정상부에 1기가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1호 고인돌은 하부구조로 추정되는 석곽만 남아 있었다.  석곽의 바닥은 아무런 시설 없이 생토면(生土面)을 그대로 이용했고, 면이 고른 할석(割石 : 깬돌)을 안쪽으로 향하여 2~4단 높이로 쌓았다. 석곽(石槨 : 돌관)의 크기는 길이 165㎝, 너비 62㎝, 깊이 62㎝이다. 출토유물은 없었으며 발굴조사 당시 농공단지 부지 조성을 위하여 부득이 매립처리 되었다.

2호 고인돌은 하부구조로 추정되는 석곽만 조사되었다. 석곽은 장벽은 3~4단으로 쌓았으며, 단벽은 1매 또는 2매의 판석을 세워 마감하였다. 바닥은 장벽에 쌓은 돌과 같은 크기의 할석을 사용해 전면에 깔았다. 출토유물은 없었으며 발굴조사 당시 농공단지 조성을 위하여 부득이 매립하게 되었으므로 유물의 보존과 후세의 교육자료로 활용하기 위하여 강릉시립박물관으로 이전 원형대로 복원하여 전시 중이다.

3호 고인돌은 이미 도굴되어 남쪽에 도굴갱이 뚫려 있고 덮개돌은 둘로 갈라진 상태로 놓여 있다. 덮개돌의 주변은 작은 냇돌들이 폭 1m 내외로 덮개돌 중간부까지 쌓여있고, 덮개돌 밑으로 받침돌들이 보인다. 덮개돌의 방향은 남-북향이며 크기는 길이 2.5m, 너비 1.7m, 두께 20㎝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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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월리 1호 고인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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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월리 2호 고인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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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월리 3호 고인돌



나. 범부리고인돌(凡阜里支石墓)


이 고인돌은 서면 범부리 산5번지 일대에 위치한다. 서면 소재지에서 남대천을 건너면 범부리 마을이 있는데, 이곳에서 남대천의 남쪽 기슭을 따라 남서쪽 약 1.8㎞쯤 거슬러 올라간 지점에 남북으로 약 20m 거리를 두고 2기가 나란히 소재하고 있다.

1호 고인돌의 덮개돌은 장방형 판석으로 크기는 길이 2m, 너비 0.83~1.45m, 두께 40㎝이다. 덮개돌 밑에는 판석으로 구성된 석관형의 하부구조가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다. 하부구조의 석실(石室 : 돌방)은 동벽은 2매, 서벽은 1매의 판석이고, 남벽과 북벽은 결실되었다. 바닥은 1매의 판석을 깔았다.

2호 고인돌은 덮개돌이 둘로 갈라져 있다. 덮개돌의 크기는 길이 2.06m, 너비 0.77m, 두께 40㎝이다. 덮개돌의 하부구조는 1호와 마찬가지로 판석으로 구성된 석관형의 석실이다. 석실의 장축인 동벽과 서벽, 그리고 단벽인 북벽은 각각 1매의 판석으로 되어 있고, 바닥에도 1매의 판석을 깔았다. 석실 내부의 크기는 길이 1.47m, 너비 0.6m, 높이 47㎝이고, 둘레에는 직경 6m 정도의 할석을 덮개돌 밑까지 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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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부리 1호 고인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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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부리 2호 고인돌

 


다. 수여리고인돌Ⅰ(水餘里支石墓Ⅰ)


이 고인돌은 손양면 수여리 전314번지 일대에 위치한다.

7번 국도변에서 오산리 방향으로 진입하여 냉수성 어류연구센터 앞에서 수여리 마을로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들어가면 마을의 동쪽 끝 낮은 능선부에소재하고 있다. 이 고인돌은 마을에서 ‘칠성바위’로불리고 있으며,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제를 올렸다고 한다. 고인돌의 덮개돌은 계란 모양으로 잘 다듬은 판석(板石)이며, 동편에 직경 약 20㎝의 구멍이 뚫려 있어 도굴된 것으로 보인다. 덮개돌의 장축은 동~서향으로 길이 3.1m, 너비 2.35m, 두께 30~40㎝이다. 덮개돌의 사방으로 약 1~1.4m 거리에 둘레돌 모양의 판석들이 세워져 있고, 둘레돌과 덮개돌 사이에는 주먹 크기의 냇돌이 깔려 있다.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는 매우 특이한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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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여리고인돌 1



라. 수여리고인돌Ⅱ(水餘里支石墓Ⅱ)


이 고인돌은 손양면 금강리고인돌로 알려져 왔으나 손양면 수여리 산4-2번지에 위치한다. 7번 국도변에서 오산리 방향으로 약 2.1㎞쯤 들어가다 두 번째 고갯길 왼쪽 구릉의 정상부에 도로방향과 나란히 놓여 있다.  고인돌의 덮개돌은 장방형의 판석으로 크기는 길이 2.5m, 너비 1.8m, 두께 40㎝이다.  하부구조는 동편에 받침돌 1개가 있고,  북쪽 즉 정상부의 노출되지 않은 지점에 길이 80㎝, 두께 30㎝ 크기의 장대석이 덮개돌을 받치고 있을 뿐, 다른 특별한 시설은 확인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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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여리고인돌 2



마. 송전리토광묘(松田里土壙墓)


이 토광묘는 손양면 송전리 23-1번지에 위치한다. 2006년 예맥문화재연구원에 의해 주택신축부지 내 신석기 유적을 발굴하던 중 영동지방에서 처음으로 확인되었다. 신석기시대 1호 주거지에서 동남쪽으로 약 2.2m 떨어진 지점에서 조사되었다. 토광묘의 평면형태는 장방형이며, 주축 방향은 동~서향에 가깝다. 1호 주거지를 둘러싸고 있는 암황갈색 모래층을 일부 파괴하고 거의 수직에 가깝게 굴착 하였다. 내부에는 점질 함량이 높은 황갈색 모래가 채워져 있었으며, 황갈색 모래층 내에서 즐문토기편(櫛文土器片) 소량이 출토되었다. 토광묘 중앙에서 서쪽으로 약간 치우쳐서 청동기시대의 삼각만입형(三角灣入形) 석촉 9점이 포개어진 상태로 출토되었다. 토광묘 유구의 규모는 길이 180㎝, 너비 8,470㎝, 깊이 25㎝이다. 최근 이와같이 청동기시대의 유구와 유물이 구릉이 아닌 사구 지대에서 간간이 발견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청동기시대 유적의 분포 범위를 사구 지대까지 확장시켜 보아야 할 필요성을 제시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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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전리 토광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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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전리 토광묘 출토유물



바. 강선리유적(降仙里遺蹟)


이 유적은 강현면 강선리 마을 뒷산에 위치한다.

1985년 동우대학의 전영수 학생이 1981년 마을 뒷산 정상부에서 청동기시대의 각종 석기류 등의 유물을 발견하여 대학에 기증하여 알려지게 되었다. 유물 출토지는 물치천을 지나 북서편의 설악산에서 동-서로 길게 뻗어내린 해발 56~58m의 구릉 정상부 일대에 해당한다. 이 구릉 일대의 북쪽에는 쌍천, 남쪽으로는 물치천이 동해로 흐르고 있어 선사 인들이 거주하기에는 매우 양호한 조건을 갖춘 지역 중의 하나이다.

1994년 강릉대학교 박물관에서 시행한 지표조사에서도 청동기시대 무문토기 편들이 주변에서 다수 수습되었다. 지금까지의 출토유물 양상과 자연 지리적 위치 및 환경을 고려해 볼 때, 강선리 구릉 일대에는 청동기시대 후기의 집단취락지가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검파두식(劍把頭飾 : 청동검 손잡이 장식), 돌낫, 반달돌칼, 돌끌, 돌대패, 돌도끼, 홈자귀, 돌화살촉, 가락바퀴, 점토대토기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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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선리 출토 유물



사. 포월리유적(浦月里遺蹟)


이 유적은 양양읍 포월리 산52번지 일대의 해발 약 22m 높이의 동~서로 길게 뻗은 나지막한 구릉 지대에 위치한다.

1992년 강릉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포월리농공단지 지정구역 내 포월리 청동기시대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청동기시대의 장방형 주거지 13기가 조사되었으며, 지석묘 2기와 신라시대 고분 3기 등이 함께 확인되었다. 포월리 청동기시대 주거지는 구릉의 능선을 따라 풍화된 암반층을 수직으로 파고 조성하였고 바닥은 평탄하게 고른 다음 점토를 깔아 다졌다. 일부 주거지에서는 벽체에 판자를 세웠던 흔적과 어깨 밑에 벽선을 따라 홈이 파여진 벽구시설도 확인되었다. 주거지의 평면형태는 대부분 장방형을 띠며, 집자리의 방향은 동~서향이 7기, 남북향이 3기, 남서~북동향이 2기, 남동~북서향이 1기이다. 집자리 규모는 10평 이상이 3기, 9평~5평 사이가 4기, 5평 이하가 1기로서 대부분 5평 이상의 집자리가 분포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출토된 토기류는 대부분 구멍무늬토기가 주종을 이루며, 석기류는 돌도끼, 돌대패, 돌화살촉, 돌검, 돌창, 그물추, 갈돌 및 갈판 등이 있다. 이 유적은 당시 조사된 집자리 유구와 출토유물의 형식으로 보아, 청동기시대 중기의 후반경인 B.C. 8세기경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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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월리유적 주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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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월리유적출토 민무늬 토기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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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월리유적출토 석기류



아. 임호정리유적(臨湖亭里遺蹟)


이 유적은 현남면 임호정리 화상천 남쪽주변의 구릉일대에 위치한다.  2005~2007년에 걸쳐 강원문화재연구소에 의해 동해고속도로 건설공사구역 내 청동기시대 유적 B·C지구 발굴과정에서 청동기시대 주거지 7기와 수혈유구 2기가 조사되었다. 주거지는 해발 22m 높이의 나지막한 구릉 정상부와 사면에 풍화암반층을 굴착하여 조성하였으며,  장축 방향은 능선과 평행하거나 직교하게 축조하였다. 평면형태는 장방형과 말각방형(抹角方形)을 띤다. 주거지의 길이가 10m 넘는 대형 주거지로는 B-1호와 B-3호가 있는데, 이중 B-1호 주거지는 그 면적이 90㎡에 이른다. 내부시설로는 주혈(柱穴 : 기둥을 세우는 구멍), 벽구(壁溝), 선반, 저장공, 노지, 배수구 등이 설치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특히 기둥구멍은 모든 주거지에 설치되었는데 주로 벽 안쪽에 시설된 벽구나 단상에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설치하였으며, 간혹 벽면에 일정 간격으로 설치되기도 하였다. 바닥은 점토를 깔고 불다짐을 하거나 생토면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유물은 이중구연토기(二重口緣土器 : 아가리에 점토띠를 덧붙인 토기) 및 공렬토기(孔列土器 : 아가리 밑에 작은 구멍이 있는 토기) 등 무문토기와 함께 석검, 석부, 석착(石鑿 : 돌끌), 석도, 석촉, 지석, 석제방추차, 어망추, 갈판 및 갈돌 등이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이 유적은 이중구연토기와 공렬토기가 함께 출토된 것을 미루어 볼 때, 청동기시대 전기에 조성된 유적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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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호정리유족 출토 민무늬토기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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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호정리유족 출토 석기류



자. 지리유적(池里遺蹟)


이 유적은 현남면 임호정리 산16-2번지 일대로서 지리마을의 발우봉(鉢盂峰)에서 동쪽으로 뻗어 내린 구릉 상에 위치한다. 2000년 강릉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동해고속도로 건설공사구역 내 청동기시대 유적에 대한 발굴과정에서 주거지 1기가 조사되었다. 주거지는 능선을 따라 동-서향으로 풍화된 암반층을 수직으로 파서 마련하였으며,  평면형태는 말각 방형으로 추정된다.  주거지의 크기는 남-북 폭 420㎝이며, 잔존하는 동-서 길이는 540㎝ 정도이다. 서벽의 수혈(竪穴 : 세로로 판 구멍) 깊이는 20㎝정도이다. 바닥은 생토층을 평탄하게 고른 후 약 4~5㎝의 두께로 진흙을 깔은 다음 불에 구워 단단하게 하였다. 가옥의 구조를 알 수 있는 기둥은 서벽에서 2개, 북벽과 남벽에서 각각 1개씩 노출되었다. 서벽 기둥의 지름은 2개 모두 약 15㎝ 정도이며, 북벽과 남벽의 지름은 각각 10㎝와 22㎝이고 기둥 간의 거리는 약 1m 정도이다. 또한 주거지 벽에는 횡보로 보이는 목탄이 확인되었으며, 판자를 사용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유물은 주거지의 서남벽 모서리에서 무경식(無莖式 : 자루에 박히는 뾰족한 부분이 없음) 화살촉 3점, 유경식(有莖式 : 자루에 박히는 뾰족한 부분이 있음) 화살촉 2점, 석창 1점, 돌대패 1점, 돌자귀 1점, 고석 2점, 숫돌 1점이 서로 세트를 이루며 출토되었고, 서쪽으로 약 20㎝ 떨어져 반월형 석도 1점이 출토되었다. 토기는 점토대 토기 구연부편 2점과 무문토기 동체부편 약간만이 바닥 중앙에서 출토되었다. 이 유적은 강릉 송림리유적과 더불어 영동지방에서 처음으로 조사된 원형 점토대토기를 공반하는 주거지로서, 청동기시대 후기의 문화상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유물의 조합상을 미루어 볼 때, 청동기시대 후기인 B.C. 5세기 이전으로 올라가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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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유적 주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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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유적 출토 석기류



차. 북평리유적(北坪里遺蹟)


이 유적은 서면 북평리 산15번지 일대로서 남대천과 후천이 합류되는 지점의 중간부에 해당하는 해발 60m 내외의 구릉 지대에 위치한다.  2010년 주문진~속초간 고속도로 건설공사 구간에 대한 예맥문화재연구원의 발굴조사를 통해 평면 장방형 주거지 2기, 방형 주거지 1기가 조사되었고, 무문토기, 점토대토기, 석촉, 검파두식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주거지의 크기는 길이 358~420㎝,  너비 185~320㎝,  깊이 16~30㎝이며,  주공과 초석으로 추정되는 강돌 등을 제외하고는 노지 등의 내부시설은 확인되지 않았다.  양양지역에서 점토대토기가 출토되는 강선리, 기정리, 송전리, 오산리, 범부리유적과 더불어 청동기시대 후기에 해당하는 점토대토기 문화의 전개 양상을 밝히는 데 추가적인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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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평리유적 주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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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평리유적 출토 토기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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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평리유적 출토 석기류



카. 범부리유적(凡阜里遺蹟)


이 유적은 서면 범부리 산22-1번지 일대로서 북평리유적의 남서쪽에 형성된 구릉 지대에 위치한다.

2010년 주문진~속초 간 고속도로 건설공사 구간에 대한 예맥문화재연구원의 발굴조사를 통해 평면 장방형 주거지 1기가 조사되었고, 원형점토대토기(圓形粘土帶土器) 1개체분을 비롯하여 토기저부(土器底部) 및 파수편(把手片 : 손잡이 조각)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주거지의 크기는 길이 530㎝, 너비 400㎝, 깊이 34㎝이며, 추정 노지 등의 내부시설이 확인되었다. 양양지역에서 점토대토기가 출토되는 강선리, 기정리, 송전리, 오산리, 북평리유적과 더불어 청동기시대 후기에 해당하는 점토대토기 문화의전개 양상을 밝히는 데 추가적인 자료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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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부리유적 주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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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부리유적 출토유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