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의 역사

2.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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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58회 작성일 2024-03-11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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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약 1만 년 전쯤 되면, 기후는 전반적으로 온난다습하게 되어 양극 지방의 두꺼운 얼음이 녹으면서 해수면이 상승하고 동식물 상의 변화가 일어난다. 이렇듯 변화한 자연환경 속에서 인류는 구석기시대의 저급한 수렵, 채집경제를 벗어나 정착 생활을 하면서 원시 농경과 목축에 의한 식량을 생산하고, 흙을 빚어 구운 토기[덧무늬토기와 빗살무늬토기]로 요리와 저장의 수단을 개발하여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돌을 갈아 만든 다양한 간석기[마제석기(磨製石器)]를 사용하고 직조(織造)기술을 개발하는 등 인류문화 발달사의 혁명적인 전기를 이룩하게 되었다. 이와같이 인류의 문화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 이 시기를 신석기시대라고 한다.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주로 식량자원이 풍부한 큰 강가나 하천 그리고 호수 주변의 대지나 해안가의모래언덕에서 움집[수혈주거(竪穴住居)]을 짓고 살았다. 움집의 보편적인 형태는 원형(圓形)으로, 집의 바닥에는 진흙을 펴서 다지고 풀이나 짐승 가죽을 깔고 생활하였으며, 화덕시설[(爐址)]을 설치하고 지붕은 주위에 서까래를 걸치고 다른 한쪽 끝이 중앙에 모이게 하여 뼈대를 형성한 후 나뭇가지나 갈대 등의 풀을 덮어 만들었는데, 대개 원추형(圓錐形)의 모습을 띠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외에도 계단이나 경사면을 만들어 출입구 시설을 하기도 하고 밑이 잘린 토기를 거꾸로 묻어 만든 저장시설을 갖추기도 하였다. 주요한 생계수단은 사냥과 고기잡이, 야생식물의 채집이었으나 신석기시대 후기로 접어들면서 원시적인 농업이 시작되어 조·피·수수·기장 같은 곡물 일부가 재배되기도 하였다.

지금까지 용호리, 조산리, 가평리, 송전리, 오산리, 남양리, 기정리, 하광정리, 원포리, 입암리, 임호정리 등 많은 곳에서 신석기시대와 관련된 유적·유물이 다수 발견되었다. 이 중 용호리유적, 오산리유적, 가평리유적, 송전리유적, 지경리유적 일부가 정식으로 발굴되어 신석기시대 초기부터 후기에 이르는 양양지역의 신석기시대 문화양상이 점차 밝혀지게 되었다.

특히 남대천 하류에 위치한 가평리, 송전리, 오산리 일대는 남북으로 연결되는 동일한 사구지대 내에 위치하고 있어 영동지방 최대 규모의 신석기시대 집단취락지가 형성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주요 유적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가. 용호리유적(龍湖里遺蹟)


이 유적은 강현면 용호리 127번지 일원으로 태백산맥에서 뻗어 내린 해발 25m 내외의 낮은 구릉과 해안사구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다. 유적의 동쪽으로 약 100m쯤에 설악해수욕장이 있으며, 남쪽으로 50m 거리에 저구릉에서 흘러내리는 소하천이 동해바다로 흘러들고, 북쪽 구릉너머에는 작은 늪지가 있어 선사인들이 살기에는 비교적 좋은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다. 2002년 강원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한 결과, 신석기시대 야외노지 10기, 소토유구 2기, 융기문토기 출토 유구 1곳 등이 확인되었으며, 융기문토기와 조합식 어구, 어망 추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신석기 전기~중기에 걸쳐 형성된 유적으로 추정되고 있다.

 

용호리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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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호리유적 야외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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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호리유적 출토유물

 


나. 오산리유적(鰲山里遺蹟)


이 유적은 손양면 오산리 60번지 일원에 위치한다. 석호인 쌍호를 매립하여 농지로 전용하는 과정에서 유물이 출토되면서 처음으로 알려졌으며, 1981년부터 1987년까지 6차례에 걸쳐 서울대학교 조사단에 의해 발굴되었다.

조사결과,  사구 지대에서 11기의 원형 집자리 [주거지(住居址)]와 야외노지로 추정되는 돌무지 등이 확인되었고, 이곳에서 복원 가능한 납작밑발형토기 20여 점과 많은 양의 빗살무늬토기 조각, 결합식

낚시 바늘, 돌톱, 흑요석, 마제석기 등 석기 300여 점과 점토제 얼굴상 1점 등이 출토되었다. 층위는 크게 3개의 문화층으로 구분된다. 이 유적은 방사선탄소연대측정 결과, 지금으로부터 약 8000년 전부터 3500년 전까지 약 4500년간 존속했으며, 지금까지 알려진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최고의 연대를 보이는 유적 중의 하나이다. 또한 이곳에서 출토된 흑요석에 대한 형광X선 분석결과, 원산지가 백두산으로 밝혀져 선사시대 원재료의 교역에 관한 과학적인 단서를 제공하였다. 1997년 4월 18일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 제394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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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리 주거지(198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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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리유적출토 덧무늬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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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리유적출토 석기류



다. 가평리유적(柯坪里遺蹟)


이 유적은 손양면 가평리 산25-2번지 일원의 사구 지대에 위치한다. 1994~1996년에 걸쳐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의해 3차례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조사결과, 신석기시대 주거지 2기 야외노지 3기가확인되었다. 주거지는 말각방형(抹角方形의 형태이며, 단사선문(短斜線文 : 짧은 금이 비스듬히 그어진)의 횡주어골문(橫走魚骨紋 : 가로지른 고기뼈 무늬), 종주어골문(縱走魚骨紋 : 평행 사선문대를 좌우 두 줄의 띠로서 사선 방향으로 서로 어긋나게 배치한 것), 사격자문(斜格子紋 : 비스듬한 격자문), 능형집선문(菱形集線紋 마름모꼴 선이 집중된 무늬), 점열집선문(點列集線紋 : 점으로 열과 선을 맞춘무늬) 등이 시문된 빗살무늬토기[즐문토기(櫛文土器)]가 출토되었다. 주거지와 야외노지에 남아 있던 탄화 목재에 대한 방사성탄소연대를 측정한 결과, B.C.3000~B.C.2000년경의 연대치가 나와 대체로 신석기 중기에 형성된 유적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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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평리유적 주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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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평리유적 야외노지



라. 송전리유적(松田里遺蹟)


이 유적은 손양면 송전리 산14-1, 1-5임 일원으로서 가평리 유적과 남북으로 길게 연결된 사구지대에 위치한다. 2006년 예맥문화 야외노지(野外爐址) 3기, 수혈유구(竪穴遺構) 1기 등이 확인되었으며, 단사집선문(短斜集線紋),  횡주어골문,  주어골문(走魚骨紋),  삼각집선문(三角集線紋),  능형집선문(菱形集線紋), 능격문(菱格紋), 격자문 등 다양한 문양이 시문된 빗살무늬토기와 석부, 석촉, 어망추, 갈판, 갈돌 등의 유물들이 다수 출토되었다. 출토유물의 방사성탄소연대측정 결과를 미루어 볼 때, 유적의 중심연대는 신석기시대 중기에 해당하며, 동일한 사구 지대로서 북쪽으로 연결되어 인접한 가평리유적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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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전리유적 2호주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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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전리유적 2호주거지



마. 지경리유적(地境里遺蹟)


이 유적은 현남면 지경리 5-7,  5-1임 일대로서화상천(和尙川)  하구 남쪽에 형성된 해발 7~9m의 퇴적사빈(堆積沙濱;모래가 퇴적된)지형의 사구 지대에 위치한다. 1995년 강릉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신석기시대 집자리 10기, 노지 3기, 소할석유구(小割石遺構) 1기 등이 발굴되었다.

신석기시대 집자리와 주변 교란층(攪亂層)에서는원형으로 복원된 빗살무늬토기 10여 점과 빗살무늬토기 조각 수백 점, 석부 12점, 석촉 17점, 석창 2점, 석도 4점, 돌그물추 331점, 갈판 10여 점, 숫돌 3점 등이 출토되었다. 주거지는 약간의 시차를 두고 조성되었는데, 지경리Ⅰ기와 Ⅱ기로 크게 구분된다.Ⅰ기는 첨저계(尖底系) 즐문토기 문화단계로 황해도 지탑리유적과 서울 암사동유적 등 중서부지역에 연결되며, Ⅱ기는 태선문계(太線文系) 즐문토기 문화단계로 동남부지역과 거의 일치되고 있다. 

이 유적은 방사성탄소 연대 측정 결과,  B.C.3355~B.C.3035년경의 연대 치가 나와 신석기시대 중기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우리나라 각 지역간 신석기시대 문화의 상대 편년과 문화교류 관계 및 신석기시대 중기 집자리형태와 가옥구조를 연구하는데 획기적 인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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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경리유적 주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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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살무늬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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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경리유적출토 금강식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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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경리유적출토 석기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