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산문화21호

고문헌자료 - 영혈사고기록(靈穴寺古記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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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2,180회 작성일 10-03-29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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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혈사고기록(靈穴寺古記錄)

영암당출세비(靈岩堂出世碑)
영암당묘잠선사(靈庵堂妙岑禪師)는 관동지방 양양의 정암리에서 김신용(金信龍)의 막내아들로 13세에 출가하여 설악산 영혈사에 들어와 성률장로(性律長老)의 수제자가 되었다.
제오세(第五世) 관암당설우(寬庵堂雪佑)로부터 청허(淸虛)하게 법을 받았다. 소시에 어렵게 지내었으나, 막바지 가는 길에 이르러 성공한 자이다. 지황의 은혜를 잊어가며 이 땅에 여러 번 절터를 이룬 흔적이 있으니 돌에 구멍을 뚫어 물에 띄우리만치 수고하시고, 실로 홀로 힘쓰셨으니, 혹이 부처를 뵐 수 있는 신인(信人)이었다. 그는 재물로도 베풀었으니 그 공을 말하면 삼세숙세(三世宿世)의 인연이라. 조금도 흠 없는 숙녀 같이 깨끗한 덕행이었고, 성정(性情)이 남과 달라 마음씨 부드럽고 지나치지 않음을 평생 업으로 삼았으니, 별로 기특하지 않다하나, 아미타불(阿彌陀佛) 부르는 소리 그치지 않았으며, 두해(二秋)이어 풍년든 가을날에 이승을 뜨려는 멸도(滅度)가 보이드니, 삼일 만에 입적하셨다.

바야흐로 열반성체를 법에 따라 설치하니, 홀연히 서풍(大風)이 크게 일어 모두가 괴이하게 여겼는데, 그 날 저녁에 이르러 서기(瑞氣)가 하늘에 가득하고, 상서로운 빛(祥光)이 불멸하니, 오로지 모인 군중이 성체를 받들어 드리며, 정골사리(頂骨舍利) 일과가 초연히 서쪽 십여 걸음에 있어, 찾아가서 거두어 석탑에 봉안하였다. 분명하게 보노라 후인(後人)이 만만세(萬萬歲) 밝히려니, 이같이 그 공적 본받음은 이에 틀림이 없도다. 반야(般若)를 모두 이루고 가셨네. 숙연히 이룬 보리살타(菩提薩埵)의 언덕이여!

서기 1760년 정월 일 세움.
명곡산인등운진일서(明谷山人騰雲震一書)
제자비구숙현 의정(弟子比丘淑賢義淨)
손제 취문 시은 청숙(孫弟就文始訔 淸淑)
각자홍구삼(刻字洪九三)

양양부설산영혈사시주기(襄陽府雪山靈穴寺施主記)
힘써 공을 세우고 덕을 널리 펴신 이는 잊지 않고 보은하는 땅에 반드시 베푸신 예전 나의 여래보살이시다. 만겁 널리 거두시고 미혹한 나루를 건너, 이제 이절에 이른, 즉 원효대사께서 굴에서 거처 하시며 가까이 당겨 오시어 헌(軒)에서 물러나시며 장삼의 자취를 남기셨는데, 터(邱墟)에 몇 번 이른, 지화도윤(智和道允) 두 승려가 있어 크게 함께 발원하니, 수삼(數三)의 승려와 더불어 부지런히 산을 내려와 널리 시주를 사뢰니, 시주를 하여 좋은 인연을 맺은 선남선녀 믿는 사람이 있었으니, 편히 수(壽)를 누리고 편안히 살아가면서 헌납하며 발원하니, 한가지로 청동(靑銅)을 시주하고 한가지로 공량(供粮)을 드리니, 이 두 가지(小雅大雅) 고상하였다. 어찌 전겁(前劫)에서 이룬 결과 아니겠으며, 진실은 이런 것인가? 금년 거듭 고쳐 잇고 으리으리하게 새로 고치었으니, 절간은 중후하게 미려하고 법의 원천(法源)이 윤이 나고 아름답도다. 불교의 법계증서로서 빼어나게 무성한 공경의 동산에 함께 시주(단나=檀那)하니, 잊지 않는 보은의 공에 귀의함에 응함이 있어 무량한 복 받은 땅이려니.

세재적승황호일(歲在赤承黃虎日) 산인지화 씀(山人智和識)

영혈사산신당중건기(靈穴寺山神當重建記)
설악의 산기슭에 영천(靈泉)이 솟는데 그 아래 고찰(古刹)은, 즉 신라 원효대사가 창건한 곳이다.
옛 당이 있어 산신령에 제사하고 항상 바람으로 인하여 나무가 꺾임을 경계하나, 힘에 겨워 미쳐 겨를을 내지 못하였으나, 위대하신 부처님이 계시니 모두가 시주를 모았다. 명복을 얻으려고 무턱대고 부처에게 절을 하는 자는 복을 얻지 못하니, 산가(山家)의 멸망한 옛일이 슬퍼서 새로이 재화를 이루어 원효대사의 옛 자취를 바라보면서 이로부터 돌이 부서지지 않으리. 아! 집을 허물고 지으니, 역시 보은의 불자는 윤회의 운명이련가. 뒤에 의지 있는 자들이 동참하니, 마음 깊이 후사를 이어가네, 이어감을 새겼다. 이어감을 새기면서 이르니.

높이 솟은 설악산의 신령님, 예부터 장생하셨다.
집도 아니고 후미도 아닌데, 오로지 당이 있었다.
무너져 새로이 다시 고치고, 사람들은 숭봉하노라.
중생들은 크나큰 마음으로, 부처님을 찾아 뵈온다.
보천의 운수를 깨닫고 나서, 오로지 천만년 이어 가리.

서기1881년 4월(歲辛巳四月) 김중욱 씀(金重昱記)

설악산영혈사단하각중건기(雪嶽山靈穴寺丹霞閣重建記)
이 절을 이르되, 신령님의 이름을 가지셨다. 산 아래 영천(靈泉)이 솟고 신령 또한 영험하다. 옛날에 신령스런 사당을 숭배하며 받들었다. 해가 오래되어 헐어 무너지니, 곧 신사(辛巳)에 이르러 현산(峴山)의 김익(金益)이 재화를 기부하여 중수(重修)하였다. 가까이 당겨 와서 절 모양이 시들어 쇠잔하고 산각(山閣) 역시 헐어 무너졌다. 즐겨 찾는 무리 없어 탄식하니 산은 헐고 돌도 슬퍼하고 새도 울고 원숭이도 울었다. 숭상하니 풍년들어 경자(庚子)년 4월에 마침 땔나무도 근심인데 이 당(堂)에 삼가 정성으로 비바람이 어려움을 감쌈을 보니 어찌 애애한 감이 없겠는가. 중간을 따라보며 새 터를 고쳐 잡고서 재화 기와 목재 석재 등을 한데 모아 거의 갖추고 음력 시월 초에 집일을 시작하여 그믐에 이르러 끝냄을 고하니, 옛것을 버리고 일신하게 되어 근엄한 그림 같은 모양이 되고 가히 모두 의지하니 샘터 위에 넓고 으리으리한 단하각(丹霞閣)이 높이 솟았다. 아! 나의 후손들이 선인의 업적을 크게 흠모하리니, 후사가 이어져 영구히 전하리다. 이어감을 새겼다. 이어감을 새기면서 이르니.

바야흐로 설악의 진터에, 절의 유업이 장존하네.
하늘이 무너짐을 막고서, 아름답게 얽으니 오로지 빛나네.
기운것을 고쳐 정돈하니, 어느 사람이 출세하나.
욕이 되는 것을 참고서 멋 데로 행하니,
사랑하고 존경함을 보고 듣노라.
조용히 돋는 하늘이 화복을 내리니, 이에 만년을 누리리.

경자년 시월(庚子十月) 김우경 삼가 씀(金禹卿謹識)

칠성계기(七星契記)
이산의 이름이 영혈과 어찌 다른가? 신라의 원효선사께서 창건한 이절에 예전에 매우 큰 칠성각이 있었는데 지금에 이르러 낡아 허물어졌으며 그렇게 두 서너번 세우고 폐하기도 하였다. 저 칠성은 하늘을 다스리는 북두칠성이다. 하늘의 운기(雲氣)로 사시(四時) 운행하면서 북두칠성은 함께 어울려 빛을 어두운 이 땅을 비추니 모든 중생은 은택이 이로우며 밝은 저 복성(福星)은 신령한 영구(靈區)를 날마다 보살피시니 고을 사람들이 복을 비는 바, 이 땅에 앞을 다투어 종종걸음으로 달려들 온다. 해는 무술(戊戌)년 3월 승려 보훈(普訓)이 대단히 슬펐던 옛 모든 사람을 구제하는 마음으로 여러분에게 알리니, 이 소리에 응하여 계(契)에 참여하는 사람이 28명이 되었다. 북두칠성이 있는 곳에 뭇별이 선회하는 이치를 알고 각기 한 푼씩 돈을 내어 6년간 늘려서, 삼방(三方)의 밭을 사들여 공량미의 밑천으로 삼았다. 하나의 작은 산신각을 다스림에 즈음하여 고적(古蹟)을 승계함에 일동의 중의를 높이 세워 받아들여 법당 서편 헌(軒)을 기복소(祈福所)로 하기로 뜻을 살펴 영구히 취하고 법식과 세목을 두(二)권의 책에 상세히 기록하여 한 권은 절의 주지에게 주고, 한 권은 계수가 간직하여 오래오래 비치하기로 참가한 모두가 동의하고 좌(左)에 열명(列名)했다. 자손 후세(後世)에 흥취를 느껴보며 끝까지 정성껏 공경하면 많은 복을 영원히 받으리라.

서기1904년 3월 상한(光武八年甲辰三月上瀚)
진사 황석만 늘그막에 씀(黃進士錫萬滄叟記)

영혈사중수기(靈穴寺重修記)
경과를 이르노라. 한결 같은 마음은 진실로 선하였다. 이 자리에 당장 성불(成佛)하고 부처를 모시는 절을 세우니 일찍이 진실하게 한 것이다. 이 일은 선남선녀의 누적된 적선을 베푼 것이며 대자대비의 크나큰 시주로서 팔만사천무량대겁(八萬四千無量大劫)을 닦고 이룬 곧 불(佛)을 이루어 가히 바로 세워본 것이다. 군(郡)이 다스리는 서쪽 설악의 동쪽에 영혈사가 있으니, 즉 삼한(三韓)의 고찰(古刹)로써 군내 네 개의 사찰 중에 하나이다. 절 서쪽에 한눈(一眼)과 다름없는 샘이 솟으니 병자를 소생시키고 우환을 고치는 유명한 절로 어찌 존숭하지 아니한가? 이곳에 올라서 조망(眺望)하니 아름답기 그지없다. 쓸 때 없는 거짓이 아니로다. 해가 오래되어 기울고 무너지고 잡목 숲이 우거진 곳, 벌레와 뱀이 우글거리는 곳, 방자하리만치 탄식하는 자도 없는데 우리 군은 밝은 해(明年)에 이르러 시주하기를 청하는 권선문을 한번 널리 펴 이루고 선남선녀로 하여금 힘 있는 데로 시주하고 재물을 모을 방침을 세워 이 고을 사람 김우경(金禹卿)으로 하여금 이 역사를 감독하게 하니, 몇 개월 지나 아주 새롭게 절간을 손질하고 지붕을 새로 고쳐 이고 기운 것을 버티고, 비뚠 것은 가지런히 하고, 도끼와 쟁기로 찍고 다듬어서 누전(樓殿)의 면모를 일신 시켰다. 향인(鄕人)을 부르니 즐거워하며, 잔을 들고 축하하기를 남산은 드높고 북두칠성은 밝노라. 가슴에 손을 얹고 천자는 억만년 사시고 제 올려 풍년들고 백성은 재해 없도록 요를 깔고 사방에 전(奠)을 올렸네. 그런즉 부처님의 공덕, 막중 막대하니, 김우경(金禹卿)씨의 자비로운 시주의 공은 아득하게 크도다. 이 고을 태수(太守)님의 역량은 어떠했나? 선(善)을 분별하여 항상 생각하며 공경하고자 함이로다.

서기1905년 2월 일(光武九年乙巳二月日)
지군 김흥기 삼가 씀(知郡金興基謹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