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산문화23호

특별기고-白凡先生님과 漢詩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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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158회 작성일 2012-03-23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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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白凡先生님과 漢詩이야기

양양문화원장 양동창

白凡先生님의 漢詩이야기를 하기 전에 선생님의 약력을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선생께서는 대한제국의 교육자이자 종교인이며 독립운동가 이시며 1876년 8월 29일 黃海道海州府의 벽지인 백운방 텃골(基洞)에서 태어나셨다.

본관은 安東이며 字는 蓮下이고 號는 白凡이다.

미천한 백성을 상징하는 白丁의“白”字와 보통사람이라는 凡夫의“凡”字를따서 지었다고 전한다.

처음 이름은 昌巖이고 19세 때에 昌洙로 바꾸었다가 37세 때 거북“龜”였던 이름을 아홉“九”로 바꾸었다고 한다.

백범 선생은 위기의 양반집안 외아들로 태어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벼슬자리를 팔고 사는 매관매직의 부패된 세태에 울분을 참지 못하여 과거를 포기하고 18세에 동학농민 운동에 참가하였고 그 후 불교에 귀의하여 법명 원종을 얻은 승려였으며, 신민회에서 활동한 개신교 신자였고, 후에 천주교 신자가 되어 받은 세례명은 베드로이다.

1919년 이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등을 지내셨다.

만주사변 이후에는 일본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중국 관내 여러 지역으로 임시정부를 옮겨 다니는 수난을 겪기도 하셨다.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의 동경의거, 윤봉길의 홍커우 의거 등을 지휘하였으며 1940년 3월부터 1947년 3월 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으로 항일투쟁을 주도하셨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임시정부 법통운동을 주창하시고 이승만 김성수 등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운동과 미소공동위원회 반대운동을 추진하였으며, 1948년 1월부터 남북협상을 주도하였다.24.jpg

그동안 일본경찰에 연행되기도 하셨고 각종 暗殺事件背後로 지목되어 재판정에 서시기도 하셨다.

1949년 6월 26일 운남 이승만의 남한단독정부 수립에“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 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위하여 단독정부를 수립하는데 협력하지 않겠다.”고 강력히 반대하고 남북협상을 통한 통일정부 수립을 추진하다 좌절한 뒤 陸軍砲兵將校였던 安斗熙의 狙擊으로 경고장에서 총을 맞고 逝去하셨으며 장례는 1949년 7월 5일 한평생 조국의 독립과 하나 된 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신 선생님의 충정을 생각하는 온 국민의 애도 속에 국민장으로 엄수되었다.

 “白凡日誌”에 나타난 선생님의 의지를 보면 “사람의 한 평생이란 참으로 짧다. 그렇지만 꼭 한번 밖에 없는 인생이다.

뒷날 남의 손가락질 안 받게 언제나 양심에 비추어 부끄러움이 없도록 처신하는 것을 좌우명으로 삼아 이 西山大師의 시를 나는 애송해 왔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西山大師는 묘향산에서 오래 머문 까닭에 西山大師로 대중에게 널리 아려졌지만 법명은 淸虛休靜(1520~ 1604)이다. 禪詩를 소개하면

“踏雪”(눈을 밟으며) 西山大師

踏雪野中去눈을 밟으며 들판을 걸을 때는

不須胡亂行모름지기 걸음걸이를 어지럽게 하지 말라.

今日我行跡오늘 내가 남겨놓은 이 발자국은

遂作後人程마침내 뒷사람들의 이정표가 되리니.

이 선시가 유명해진 결정적인 요인은 白凡金九선생의 座右 銘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詩자체가 누구나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해주는 명문인 까닭이다.

인천 대공원 백범광장에는 이 선시를 돌에 커다랗게 새겨놓고 <그림1>오가는 이들에게 무언의 가르침을 내리고 있다.

또한 이시는 백범이 만년에 즐겨 썼던 시<그림2>로 1946년 10월 26일 안중근 의거 기념일에 쓴 것이다.

백범이 이 시로서 조국이 눈보라치는 위기에 당면 할 때 일신의 안위나 이해관계보다는 후손들에게 남겨줄 역사를 강조하셨다.

너무나 감동적인 김구선생의 어록을 소개하면

25.jpg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만이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요 경제력도 아니다.

... 인류가 현재 불행한 근본원인은 仁義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 인류의 정신을 배워야 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특히 선생께서 대한민국의 독립에 강한의지를 천명하신 것을 입증하는 어록을 소개하면 “네 소원이 무엇이냐?”라고 하느님께서 물으신다면

“내 소원은 대한독립이오.”라고 말할 것이다.

“그다음 소원이 무엇이냐?”고 하면“우리나라의 독립이오.”

“또 그다음 소원이 무엇이냐?”물으면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라고 대답할 것이다.

내가 원하는 우리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적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살고 인류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자는 것이다.

다음은 自由中國蔣介石總統이 白凡선생님의 서거를 추모하면서 영전에 보낸 輓詩를 소개하고자 한다.

<輓詩란? 상여를 끌 다라는 뜻의 끌만(輓)자로 사람이 죽으면 상여를 끌 때 하도 서러워서 詩로서 죽은 자를 애도하며 쓴 시를 말한다. >

輓白凡金九先生

樞星一夜落江山추성이 하룻밤에 떨어진 강산

天動地悲水自鳴하늘과 땅이 놀라 슬퍼하니 물도 우는 도다.

血淚溱溱滄海潤피눈물 많고 많아 창해를 적시고

憤心疊疊泰山輕분한 마음 겹치니 태산도 가벼우이.

堂堂義氣生前業당당한 의기는 생전에 업적을 쌓았고

烈烈精神死後名열렬한 정신은 사후에 이름을 더하네.

千秋寃恨憑誰問천추의 원한을 누구에게 물어 볼까

寂寞皇陵白日明적막한 황릉에 백일 만이 밝았더라.

※ 樞星: 北斗七星의 첫째별

2002년 10월 22일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동 255번지에 건립 개관한 백범김구기념관은 백범선생의 유업을 계승하고 추모 사업을 봉행하는 한편 완전 자주통일 독립정신을 수련하고 실천하는 도장이고 통일 조국을 실현하고 애국애족정신과 민족정기를 선양하여 다음세대에 민족적인 이상을 추구하는 정신적 모태가 되도록 건립된 것이다.

백범선생은 파란만장한 일생을 오직 조국과 조국의 백성들을 위하여 살다가 끝내 통일 조국을 보지 못하시고 흉탄에 서거하셨다.

우리는 선생님의 독립애국 사상과 행동 그리고 동일의지를 새기면서 우리가 무엇을 진정 생각하고 실천할지를 마음으로 다짐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