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산문화23호

특별기고 - 양양군정사 83『 약진도상의 수복지구』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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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4,985회 작성일 2012-03-23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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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양양군정사 83『 약진도상의 수복지구』에 대하여

장정룡(강릉원주대 교수)

 

 

1. 머리말

『약진도상의 수복지구』는 양양군 수복지구건설위원회와 양양군청에서 1953년 7월에 49쪽으로 발행하였다.

국한문 혼용체와 영문으로 수록하였으며 크기는 4×6배판이다. 표지는 컬러로 의상대 사진을 수록하였다. 『약진도상(躍進途上)의 수복지구(收復地區)』목차는 다음과 같다.

이형근 중장 약력, 여명, 증강일로의 국군 22·25사단창설 기념식에 이대통령각하 임석, 일면작전 일면건설(양양교의 웅자, 동교준공기념탑, 공병단의 가교광경, 충통로 개통기념과 제자를 쓰신 최홍희 장군, 수복지구 양양지도) 향토재건에 청년도 궐기, 향토를 찾아온 주민들, 풍년이다. 어촌의 아침은 밝어온다, 바다는 우리의 생명, 교육의 재건상, 총후치안은 철벽의 포진, 신앙의 자유, 거리의 천사, 민간인의 구호활동, 수복지구의 이모저모, 군단장각하의 민정시찰, 명승과 고적, 어린이는 나라의 보배, 이형근장군 인상기(김팔봉), 편집여록 등이다.

이 내용가운데 1952년부터 1953년 휴전이 되기 전후 수복지구 군정(軍政)양양의 과거모습을 되살펴볼 수 있는 내용들을 중심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한국전쟁 직후 북한 지역의 피난민들이 월남하여 양양군 속초읍 지역에 몰려들었으며1) 38이북지역인 양양군은 휴전이 되기 전까지 북한 공산정권하에 6~7년의 압정에 시달렸으며, 한편으로 북한 괴뢰군과 전쟁을 계속하고 한편으로는 전쟁피해를 복구하면서 주둔국군에 의한 군정에 들어갔다. 따라서 당시는 이른바‘일면작전(一面作戰), 일면건설(一面建設)’의 혼란기였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강점기로부터 한반도는 해방이 되었으나 미소 양국이 38선을 중심으로 남쪽지역은 미군정하에 들어갔으며, 1946년 1월 15일 남조선국방경비대가 창설되었고 당시 제2연대장은 이형근(1920.11.2~2002.1.13)이었다.2) 그리고 1952년 1월 이형근 중장이 수복지구 양양군 군정사령관으로 부임하였다. 1954년 10월 21일 법률 제350호‘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시행으로 38이북지역인 양양군이 수복되었다.3) 당시에 양양군에는 수복지구건설위원회라는 조직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수복지구건설위원회는 1군단 군정의 지휘를 받았던 군정예하위원회로 볼 수 있다.

한반도의 군정은 당시‘세계적 관심사’였다고 하는데, 이러한 미군정 기간을‘잃어버린 또 하나의 역사’라고 평가하기도 한다.4) 유엔군의 일환으로 미군정이 시행된 인구 7만여명의 수복지구 양양군은 1951년 7월 4일 한국군 제1군단이 군정을 주도하였다. 군정시기는 1951년 8월부터 1954년 11월까지 3년 4개월기간인데 38이북 지역에서 수복된 강원도 7개군(양양군, 고성군, 인제군, 양구군, 화천군, 철원군, 춘성군)과 경기도 2개군(연천군, 북포천군) 가운데 강원도 양양군만 군정이 실시되어 민간인들도 거주할 수 있었다. 이처럼 양양군에 유엔군을 대표하는 미군이 군정을 실시하게 된 이유나 군정의 실제, 운영체계 및 내용 등이 분석된 바 있다.5) 이 지역만 군정을 실시한 이유에 대하여, 이곳이 공산주의 행정연구와 공산주의 지역재건을 위한 절대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었음이 1952년 38이북지역인 양양과 속초지역을 방문했던 첩보원 오스본(J.Osborne)의 보고서에 나타난다.6)

민간인이 아닌 군인들에 의한 양양군정(郡政)의 군정(軍政)은 미제8군사령부 행정명령 제34호 부칙에 의거 실시하였고, 양양군 8개읍면이 수복을 개시하여 주민 총수 7만명, 수복지구 총면적(고성 간성지구는 제외) 582㎢에 달한 지역을 관장하였다. 1951년 7월 5일 군내 전반에 걸쳐 읍면자치위원회 구성, 7월 10일에 군자치위원회 형성, 8월 10일 군관하지구 행정잠정규정 공포, 각리장과 읍면장 선거, 8월 10일에는 민정군수를 선출하고 초대민정관 으로 박종승(朴鍾勝, 1951. 8. 10~1954. 11.17, 3년 4개월 재임) 씨가 당선되었으며, 9월 19일에는 각읍면협의원을 선출하였다.

6.25사변 당시 군정(軍政)은 제1군단장 김백일(金白一), 백선엽, 김종오, 이형근 장군이 군정을 포시(布施)하였으며 1953년 10월 26일 수복된 7개읍면에서 읍면민정관 선거가 실시되었다. 당시 급속적인 수복지구 재건을 위해서 속초읍 김근식, 양양면 김익종, 강현면 이찬우, 토성면 박주하, 죽왕면 김창길, 서면 손병환, 손양면 고연재, 현북면 오국현이 임명되었다.7) 군정당시는 이 지역이 대한민국의 관할이 아니었고, 그 통치권은 유엔군에 있었으므로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고 나서 이승만 정권은 양양과 속초를 비롯한 수복지역에 대한 행정권 이양협상을 하였다. 당시 군정의 최종 결정권, 통치권, 행정권은 유엔군 총사령관에게 있었으며, 유엔군사령부 내 민사행정보조팀(Civil Assistant Team)이 주도하였다. 이들은 현지군정에서 정책을 입안하고 결정하되, 한국군 군정팀에게 집행권을 부여하여 형식적으로 고문역을 담당하고 군정의 전면에는 1군단 군정사령부가 실무에 나섰다.

군정사령부는 민사처(1952년 당시 제1군단 민사처장은 오천덕이었다)를 통해서 민정을 실시하고 구체적으로 행정을 집행한 것은 현지민사팀, 양양군민정관(군수), 읍민정관(읍장) 등이었다. 읍민정관 밑에는 치안대, 국민회, 대한청년단, 대한부인회 등의 실무기구가 있었다. 이들로 구성된 현지민사팀은 군정사령부의 승인하에 공산주의자 색출에 나서기도 하였다. 수복 초기 속초지부 대한청년단(한청)은 500명 이상의 단원이 소속되었다고 한다. 이에 따라서 유엔군인 미군에 의해서 군정이 실시된 양양지역은 민사행정보조팀(CAT)의 지휘를받는 한국군 군정팀이 있었고 그 예하에 현지민사팀이 존재하여 군정지역을 통할하였다.

한국군 1군단 민사처에서는 부정기적으로 강릉에 주둔한 미8군 동해사령부에서 구호물자를 직접 인수하여, 각 민정관과 주무부처 직원, 구장, 피난민 반장 등을 소집하여 물자를 나누어 지급하면 그들이 현지에 가서 일정량을 배급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속초읍의 경우‘요구호대상자’는 1952년 6월 이후 1953년 5월말까지 3.661세대 16.213명 가운데 2.204세대 7.364명이 모포, 의류, 식료품, 피혁, 일용품, 소금, 천막, 농업용 도구를 지급받았고, 구호양곡으로 외미(外米=안남미)와 소맥, 대맥, 고량미, 수수 등을 배급받고, 그 외에도 어선용 전나무, 주택용 자재, 의약품, 학용품, 책상 등을 배급하기도 했다. 수복기념림을 조성하고 학교와 문화재를 복구하고 어선을 수리하고, 도로를 개수하였으며, 고아원과 교회를 설립하는 등 수복지구 주민들을 위해 노력하였고, 지역주민들도 한청을 조직하여 군정에 협조하면서 불순분자들을 색출하는데 도왔고 지역농악대가 군단에 위문공연을 하는 등 군정과 주민사이에 다양한 소통이 이루어지기도 했으나 군정이 주민생활안정, 산업진흥, 교육재건을 위해 수복지구 주민들에게 일방적으로 도움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26.jpg 유엔군 소속 미8군이 한국군 제1군단에게 지역행정권을 넘겨준 때는 1954년 6월이며, 1군단이 다시 민정이양을 한 때가 1954년 11월 17일이었다. 따라서 대한민국 행정권이 38이북 수복지역은 미치지 못했으며 실제로 군정의 권한은 막강했다. 그러므로 대한민국 정부는 군정지역이나 군정 자체에 대해서 영향력을 거의 행사하지 못했던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드디어 1953년 10월 30일 양양군 7개읍면의 민주선거가 치뤄졌다. 이에 대한 반론도 있는데 과거 공산주의 치하에서 살던 주민들에게 민주주의를 맛보게 하기 위해서 민주선거가 주민의 100%가 투표했다는 것에 대해서 실시자체에 의문을 품기도 한다. 여하튼 8개읍면의 민정관이 선출되었으며, 1954년 11월 17일 군정에서 민정(民政)으로 이양되고 김주혁(金周赫, 1954. 11. 17~1956. 9 .9)이 군수로 당선되기에 이르렀다.

본고에서 소개하는 이 자료는 1952년 1월 제1군단장 이형근 장군이 부임하여 1953년 7월까지 1년 6개월간 있었던 양양 군정 당시를 소개한 것으로서 제1군단 창설 3주년 기념으로 출간된 것이다. 당시 양양군 속초지역은 제1군단장인 이형근 군정사령관에 의해서 재건이 주도되었으므로 소위‘이형근공화국’이라는 말도 나왔고“군정시절 이형근 장군과 그의 미녀부인이야기, 그가 부월리, 조양동 사람들을 내쫓았다는 이야기, 몰래 나온 미군물자가 중앙동이며, 영랑동 시장에 가득 찼다.”8)는 이야기 등등이 지금도 회고담으로 나올 정도로 당시 상황은 특별하였다. 그동안 수복지구인 양양군정과 지역주민에 대한 연구는 사실상 미흡하였다.

1953년 7월 5일 발간된『약진도상의 수복지구』책자는 군정당시의 행적이나 양양군 지역의 복구상황을 이해하는데 다소나마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서 원문 한자는 한글로 바꾸고 맞춤법은 표준어로 고쳤다. 글씨가 작고 국한문을 혼용한 인쇄가 부정확하여 판독에 어려운 점이 많아서 내용상 오류가 없지 않을 것이다.

 

2. 1950년대 수복지구 양양군정의 제 양상

1) 여명(黎明)

[이형근(李亨根, 1920. 11. 2~2002. 1. 13) 중장 약력]
1929년 충남공주출생, 일본육군사관학교급 동육군야전포병학교 졸업, 일본군 육군대위로 제2차대전시 중국과 불인(佛印)국경에 출전하였다가 해방후 귀국, 1946년 1월 국방경비대 최초로 대위임관, 1946년 5월 국방경비대 사관학교장, 1946년 10월 국방경비대총사령관, 1948년 2월 통비부참모총장, 1948년 8월~1949년 5월 도미(渡美)군사시찰, 1949년 6월 제8사단장, 1950년 10월 제3군단장, 1951년 8월 교육총감, 1951년 9월 정전(停戰)대표, 1952년 1월 제1군단장으로서 현재에 직함.

찬(讚) 이형근 장군

맑은 호수처럼 이지(理智)에 빛나는 눈동자에는

항상 미소하는 웃음이 떠올라

언제나 춘풍이 태탕(●蕩)하고…

삼군(三軍)을 질타(叱咤)하는 그 위엄은

서릿발처럼 무겁고 날카로워

전군(全軍)의 신망을 한 몸에 지니니

아! 님은 용장(勇將)이외다

지장(智將), 덕장(德將)이외다.(1953. 7. 5, 鳳儀學人記)

1950년 6월 25일, 북한괴뢰의 남침이 있자 임전태세를 갖추기 위하여 구성된 제1군단은 1953년 7월 5일로서 만 3주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전투발발이래 우리 군단은 처음 작전상 후퇴작전과 북진, 또다시 북진에서 현 전선방어전까지의 계단을 삼단계로 나눌 수 있다. 과거의 쌓아놓은 찬연한 업적은 우리군단의 불멸의 금자탑이거니와 처참가열(悽慘苛烈)한 과거 1년 반 동안 육군중장 이형근(李亨根) 장군께서 군단장으로 취임하신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쌓아놓은 군단역사는 한국동란과 함께 영원히 청사(靑史)에 길이 수놓아질 것이다.

일면 작전, 일면 건설의 군정(軍政)을 실시하고 있는 현재 실정은 다른 전투면 만을 맡은 지구와는 전혀 그 실정이 다른 것이다. 다른 지구는 정면의 적과 대치하고서 전투만하면 되는 터이거니와 우리 군단은 주저항선에 있는 적과 대치하여 치열한 전투를 감행하는 일면, 수복지구 7만여 주민들의 생활안정과 치안확보는 물론 산업, 경제, 교육, 문화, 의료 각각 부면에 있어 군정을 실시하여야 하기 때문에 군단에 부하(負荷)된 사명은 중차대한 것이었다. 이곳 지구가 종전 북한괴뢰의 치하에 있던 곳이요 6~7년간이나 공산학정아래 신음하던 동포들이기 때문에 군정을 실시한다고 하는 것은 세계의 이목을 이끄는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격언과 같이 군단장 각하의 애민구휼(愛民救恤)하는 덕정과 군단장 각하를 자부(慈父)같이 존경하는 주민들의 마음은 이심전심(以心傳心)하나로 귀일되기 때문에 수복지구의 군정은 날로 주민의 생활안정과 향상을 달성하고 있다. 그간 이 장군 취임이래로 영일(寧日)없이 아방(我方)진지에 침투를 꾀하는 괴뢰군은 전후 수10회에 걸쳐서 공격을 가해왔으나 우리 국군은 단호 이를 포착섬멸(捕捉殲滅)하였다. 1952년 7월 10일, 8월 22일, 11월 9일에 벌어졌던 351고지 공방전은 적으로 하여금 막대한 출혈을 재래(齎來)케 하였으며 다시 더 침투를 단념하게까지 하였다. 최근 생포된 적 포로의 진술에 의하면 적은 김일성의 명령에 의하여 기필코 351고지탈환을 명세하였으나 마침내 뜻을 이루지못하였다는 증언까지 한 바 있는 것으로 보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전기 3차에 걸친 소전투만으로도 적에게 준 타격은 심대한 것으로서 아방이 거둔 전과로는 사살 912명, 부상 575명, 포로 17명, 소통 137정, 다발총 20정, 추격포, 전화기, 쌍안경 기타 무기 탄약 다수를 노획하였으며, 적의 토치카 수백개소를 폭파하는 전과를 올리고 있다.

27.jpg  적 포로의 진술에 의하면 적은 고지 앞 남강(南江)을 일체 건너오지 말라는 엄명을 받고 있다고 한다. 그것은 남강을 한걸음이라도 넘어만 오면은 섬멸을 당하기 때문에 내심 전전긍긍하고 있는 까닭이라고 한다. 이를 계기로 하여 이 군단장 각하는 작전방침을 신경선전전에 중점을 두시고서 대이북 괴뢰군 귀순공작과 선전공작을 강력히 전개하여 다대한 성과를 거두고 있는 중이다. 객년중(客年中)에도 2개 사단의 새로운 창설을 보았고, 지난 5월 15일에도 또다시 2개 사단의 증설을 보아 전력의 증강과 강병육성에 새로운 포진을 하신 상승(常勝)장군 이중장 각하는 앞날의 새로운 구상을 마음에 그리시면서 휘하장병에게 강철같은 투지를 양성하고 계시다. 흘러가는 역사의 수레바퀴가 이 장군의 혁혁한 공훈과 우리 군단의 찬연한 업적을 길이 청사에 영광스러운 빛을 남기리라. 여명의 날은 밝아온다. 우리군단이 가진 바 특생은 현재 담당하고 있는 지점이 155리 전(全) 전선에서 가장 이북에 위치하고 있어 적의 군사시설의 심장부인 원산을 육박하고 있는 점, 또 하나는 적이 휴전문제가 대두하자 38선까지 탈환을 꾀하고 수십 차에 걸쳐서 치열한 공세를 취하고 있으나 그 시(時) 마다 적은 심대한 출혈만 내고서 일보도 아군 진지를 침범하지 못하는 점이 수복지구를 가지고 있는 우리 군단의 2대 특색인 것이다. 이 특색을 살리어 수십만 장병은 군단장 이 장군을 모시고 우직 북진의 날을 기다리고 있다.

 

2) 증강일로의 국군 -22, 25사단창설기념식에 이대통령각하 임석

28.jpg역사는 흐른다. 흘러가는 역사가운데 새로운 창조가 있다. 이것은 우리 대한민국의 건군사(建軍史)이다. 1953년 6월 15일, 세계의 이목을 총집중한 가운데 우리군단 제22사단과 제25사단 창설기념식이 ○○지구에서 거행되었다. 자라는 이 나라 국군들의 씩씩한 모습을 친히 사열하시기 위하여 이날 이 대통령각하께서는 미제8군단사령관 테일러장군과 신국방, 진내무, 변외무장관, 원헌병총사령관 등 정부요인들을 대동하시고 우리 군단을 내방하시었다. 이번 내임하신 것이 우리 군단에는 세 번째 되는 일이다. 먼저 창설기념식에 임하시어 사단에 사단기를 수여하시고 아래와 같은 간곡한 훈시가 계시었다. “우리나라 국군이 창설된 지 불과 얼마 안되는 동안 우리의 성가는 높이 평가되고 있다. 우방 여러 나라에서 군사와 물자를 많이 보내줌으로 우리의 적을 쳐물리치고 남북통일을 완수할 날도 멀지 않다. 특히 우리들은 미국을 위시하여 모든 우방국가에 감사하는 바이며 증강되어 가고 있는 우리장병들에게 영광이 있기를 바란다.”라는 의미심장한 훈시가 계시었다. 기념식이 끝난 다음이 대통령께서는 관동팔경의 하나인 청간정을 시찰하시고 이어 군단으로 돌아오시어 잠시 소게 후(少憩後) 군단장 육군중장 이형근 각하 태극성훈장 육군소장 김종갑 각하 태극무성훈장 육군준장 임부택 각하 화랑금성 훈장 이하 장병다수, 전기행사가 종료된 다음 이 대통령각하 내외분은 통일없는 휴전결사반대 양양군민총궐 기대회 임석하시어 3만여 군중의 환호를 받으시면서 친히 미제8군사령관 테일장군을 소개하시고 간곡한 훈시를 하신 다음 회정에 오르셨다.

 

3) 일면 작전, 일면 건설

29.jpg 파괴는 건설을 낳는다고 한다. 처참한 전화(戰禍)는 국토전반에 걸쳐서 막대한 손실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악착스러운 적마(赤魔)를 몰아내고 수복된 지구에서는 건설의 망치소리로 드높게 새로운 부흥과 건설이 이루어진다. 군단에서는 일면진격, 일면건설의 표어아래 도로교량의 복구공사를 우리 공병대원들의 손만으로서 속속 완성하고 있다. 양양읍내를 관통하는 남대천에는 우리 공병대 1101부대의 혈한(血汗)으로 이루어진 양양교가 가교되었다. 전장0000미米(m)에 달하는 이 교량이야말로 우리나라에 있어서 군용교량으로서 최초의 가설이요 최대 최장의 교량인 것이다. 자랑한만한 우리 공병대의 특출한 기술은 가교공사에 있어서도 개가를 올리고 있다. 그리고 동 부대(1101)에서는 ○○으로부터 ○○○에 이르는 구간도로 32km를 새로 개간하였는데 동 도로는 일찍이 일정 때 3년 9개월이나 걸리면서도 개통을 보지 못하던 도로를 우리 공병대에서는 불과 6개월 동안에 개통한 것이다. 이것은 오로지 애국지성에서 우러나온 결정이기 때문에 도로명칭도 충통로(忠通路)라고 명명한 것이다.

 

30.jpg 4) 향토건설에 청년도 궐기

4284(1951)년 6월 2일 38선을 두 번째 돌파한 우리 군단은 노도(怒濤)처럼 일로북진을 계속하였다.

공산학정 하에서 죽음의 행진과 같은 신산(辛酸)한 생활을 거듭해오던 이북주민들은 지옥에서 구세주를 만나는 것처럼 반기었다. 일차후퇴 때에 이남으로 피난갔던 수만주민은 군단이 진격하자 때를 놓치지 않고 정든 고향을 찾아왔다.

수복지구 양양일원은 7월 4일 미제8군사령부 행정명령 제34호 부칙에 의거하여 군정을 실시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8개읍면이 수복을 개시하여 현재 주민 총수 7만을 산(算)하고 수복지구 총면적(고성 간성지구는 제외) 평방 582㎞에 달하고 있다. 7월 5일 군내 전반에 걸쳐 읍면자치위원회를 구성하고 7월 10일에 군자치위원회를 형성하였다. 8월 10일에는 군관하지구 행정잠정규정을 공포하고 각리장, 읍면장을 선거한 다음 동 10일에는 군민정군수를 선출(초대민정관 박종승씨)하고 9월 19일에는 각읍면협의원을 선출하였다.

군단에서는 민주주의 하에서 민의를 창탈하기 위하여 매 월말에 군민과 더불어 격의없는 의견 개진과 건의를 받아들이는 간담회를 개최하는데 이때에는 군단장 이 장군만 임석하고 진지한 민중의 여론을 청취하는 것이다. 잠정적인 행정조치로서 본의 아닌 군정을 실시하고 있기는 하나 온정의 인(人) 이 군단장 각하는 군정의 목표를 ⓛ주민생활 안정과 향상 ②교육의 재건 ③산업의 진흥으로 결정하고 주민과 더불어 호흡을 같이 하고자 하여 자녀교육도 이곳 학교에 입학을 시키어 수복지구 자녀들과의 어깨를 견주고 공부하고 있다. 일반 주민들에게 만곡의 신뢰감과 안심감을 주고 있는 것이다. 표고 1.705m나 되는 설악연봉 아래서 잃었던 고토(故土)를 찾고 귀농의 환희를 감출 수 없어 장군의 성덕을 송가(頌歌)하는 소리는 지구 일대에 넘치고 있다.

한가한 물레방아가 옛 주인을 기다리는가 하면 폐허에서 건설의 망치소리 요란한 가운데 주택과 점포가 하나씩 둘씩 늘어가고 있다. 여기 있어서도 군단공병대에서는 설계측량 지균(地均)공사 등 진정한 주민의 벗으로서 모든 편의를 돌보아주는 것은 물론이다. 가옥은 지어야 하겠는데 목재가 없다. 군단에서는 괴뢰 정권 때에 벌채하여 놓았던 원목을 주민들에게 분담하여 제재소를 설치하고 목재를 생산케 하였다. 어촌에서는 부서진 뱃쪼가리를 다시 모아 수리도 하고 새로 건조도 하여 어로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수복지구는 하루바삐 대한민국의 기반에 들어갈 날을 기다리면서 밝아가는 내일의 희망을 벅찬건설의 행진보(行進譜)를 아뢰고 있다.

 

5) 향토를 찾아온 주민들

4284년(1951) 7월 4일 미8군사령부의 합의하에 귀농선(歸農線)이 설정되자, 이곳 원주민들은 풍찬노숙(風餐露宿) 거리에서 해매이다가 고기가 물을 찾은 것처럼 기뻐하며 속속 고향으로 돌아왔다. 비록 폐허가 되었을망정 조상의 분묘가 있지를 아니한가! 남편을! 그리고 아들을, 동생을, 공산도배(共産徒輩)에게 빼앗겼을망정 정든 고토이니 오로지 남은 것은 증산으로 멸공대도(滅共大道)를 매진할 따름. 농지개혁이니 무엇이니 하고 토지를 빼앗겼던 농민들이 잃었던 제 땅을 도로 찾으니 농부들의 얼굴에는 희망과 행복감만이 넘쳐흐르고 있다. 주민들에게 있어서 군단장 이장군은 자부와 같은 존경과 신뢰감을 받고 있다. 농토는 모자라지는 않은가? 비료는 얼마나 필요한가? 병이나 나지 않았는가? 전투지휘에 여념이 없으신 가운데에서도 장군은 수시로 민생문제를 염려하고 계신다. 녹비(綠肥)를 채취하여 농토를 비옥케하는 한편 군단민사부(軍團民事部)의 알선으로서 금비(金肥)도 구입하여 시비를 하고 풍년가도 드높게 모를 내는 여인들의 얼굴에도 희망의 약동하는모습이 빛나고 있다.

 

6) 풍년이다

우리나라는 고래(古來)로 농업국이다. 전주민의 7할 이상이 농민인 만큼 이 나라 백성들은 흙과 더불어 낳고 흙과 더불어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타고난 운명이다. 전방에는 백전백승의 충용무비(忠勇無比)한 우리장병들이 호군(胡軍)의 침략을 막아내고 있으니 베개를 높이 베고 잠을 잘 수 있으며, 마음껏 농사를 지을 수가 있다. 세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전선 전방불과 40㎞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농사를 짓는 나라가 있을 것이냐? 피땀 흘려 지어논 농사가 올해도 시화연풍(時和年豊)으로 풍작이 되어 추수의 기쁨은 말할 수 없다.

손이 모자라 안타까워하는 농부들은 불패에 쉬고 있는 군단장병들이 내 집일인양 찾아가서“아저씨! 제가 좀 도와 드릴까요?”하고 농사뒷바라지를 도와주는 것도 이곳 지구가 아니면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다운 풍경이다.

 

7) 어촌의 아침은 밝아온다

해안선 길이를 많이 가지고 있기로 국내 제3위를 차지한 강원도, 그 가운데도 38이북으로 편입되었던, 통천, 고성, 양양은 어획(漁獲)으로서 명성을 날렸던 곳이다. 보고(寶庫)인 바다, 넘실거리는 아침 동해는 대한사람의 마음의 상징인양 한없이 맑고 깨끗하다. 밝아오는 어촌의 아침은 수복지구 어촌주민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과 동시에 바다와 싸우는 전쟁을 의미하기도 한다. 원양출어는 선박, 어로자재 관계로서 그 실현이 어렵거니와 근해출어는 한정된 선박과 있는 기재로서 충용하여 기대이상의 성과를 거두고 있다. 허물어져 가는 옛집을 찾아와서 거처를 수리하고 풍마우(風磨雨)선에 마음대로 허물어진 뱃조각을 모아 황파만리(荒波萬里) 거친 바다와 싸워나가는 이 땅 어민들의 재건상은 괄목할 바가 있다. 특히 여인들이 미역(和布)을 따다가 건조하여 남한 일대에 보내는 양은 실로 방대한 양에 달하고 있다.

 

8) 바다는 우리의 생명

어민은 바다가 생명이다. 농민이 흙에서 나서 흙에서 살다가 흙에서 죽는다고 하면 어민은 바다에서 나서 바다에서 살다가 바다에서 죽는 것이 어민들의 타고난 운명이리라. 속초, 아야진, 문암, 천진 등 대소항구를 기점으로 하고 수복지구 수천 어민들이 바다와 싸우는 용자(勇者)로서 무진장의 보고를 찾아내는 것은 멸공을 위한 증산(增産)부대의 첨단을 걷는 것일 것이다. 여명의 이른아침, 효암(曉闇)을 뚫고 용약(勇躍) 바다로 출어하는 것은 둔대에서 새벽출격을 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배선창 한창 밑은 천길 만길 깊은 심해이다. 질풍노도에 봉착한 일은 없는가? 소련영해로부터 내려 보낸 수초와 부탁친 일은 없던가? 죽고사는 것을 초개(草芥)같이 여기고 바다로 출어하는 수복지구 어민들의 씩씩한 모습이야말로 실로 탐스러운 바가 있다. 저녁노을이 붉고 누렇게 물든 무렵 산 같이 쌓인 해초구망 생어등을 만재하고 돌아오는 어민들의 얼굴에는 어디인가도 무르게 환희에 빛나고 있다. 은린이 찬연한 생어가 꼬리를 치면서 선창에서 뛰는 광경은 이곳 어민들만이 맛볼 수 있는 진지한 관경들이다. 원포귀범(遠浦歸帆)에 흰 돛, 누런 돛을 달고 풍어를 자랑하는 대어의 깃발이 휘날리는 것을 기다리는 바닷가 여인들의 구성진 아리랑도 평화스런 수복지구에서만 맛볼 수 있는 풍경이다. 미역따는 여인들과 명태잡는 어부들의 이중주로 아뢰이는 배따라기는 오늘하루도 바다에서 날아가고 바다에서 날이저문다.

 

9) 교육의 재건상

교육은 그 나라 그 사회문화의 척도이다. 배움의 전당이 회진(灰●)하였다고해서 과공(課工)을 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수복지구에 있어서도 수복주민들이 제일먼저 부르짖은 것은 교육문제이었다. “가르쳐야 한다.”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하고 주민들은 군단장 각하의 절대적인 성원을 얻어 학교를 짓기 시작하였다. 이곳에도 학교, 저곳에도 학교, 닥치는 곳마다 글읽는소리 낭낭하게 들려온다. 4286년(1953) 5월 1일 현재 고등학교 2개교, 중등학교 3개소, 국민학교 14개소 계 19개학교에 남녀생도 아동수가 12,720명에 달하며 교직원이 233명이라고 한다. 대략 현재 통계로 보면 아래와 같다.

속초고등학교:남141명 여17명 계158명, 양양고등학교:남100명 여9명 계109명, 속초중학교:남268명 여72명 계340명, 양양중학교:남254명 여78명 계332명, 동광중학교:남237명 여46명 계283명, 국민학교(14개소):남 6.450명 여5.048명 계11.498명, 합계 남7.450명 여5.450명 계12.720명, 직원 남180명 여53명 계233명

동심 그대로 미래를 걸머지고 나갈 무궁화 꽃봉우리, 피난살이 고생에 시달리면서도 인공괴뢰들의 무도한 강제교육도 이제는 모두 악몽처럼 깨어난 어린 학생들이 날마다 다시 또 새는 날마다 교교이 들려오는 함성을 들어가면서 마음조차 가볍게 과공을 연마하고 잇다. 각계각층으로부터 학교재건에 대한 물심양면의 적극원조 가 있기는 하지마는 교수재료와 비품이 없는 것은 가장 큰 곤란이다. “생도와 아동들이 책상이 없다!”이 소리를 들으신 이 군단장 각하께서는 미제8군에 연락하여 포탄상자 약 4.000개를 군민정관에게 기증하여 그것으로서 훌륭한 책상과 걸상을 만들었다. 자- 이제는 교사(校舍)가 낙성되고 아동들의 책상 걸상까지 완비되었으니 대한의 아들딸로서 갖추어야 할 자질을 배양하여야 하겠다. 1만2천의 총준(聰俊)들이 수복에서 또다시 북진을 기원하면서 열심으로 공부하고 있는 것을 볼 때에는 실로 눈물겨운 바가 있다. 제반 UN교육시찰단 일행이 시찰을 하고 난 뒤에도 수복지구에서 이렇게 훌륭한 교육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감탄한 바가 있다. 군단장님의 군정방침가운데 있어서도 둘째로 교육의 재건을 주창한 바 있거니와 이 장군은 교육의 근본정신을“배워서 우리민족의 부족한 점을 깨닫고 이 민족의 결점을 보족하기 위하여 궐기하여야 하며 이로서만 우리민족의 급진하고도 획기적인 발전을 기대할 수가 있는 것이다.”라고 굳은 신념하에 방침을 세신 것이다.

 

10) 국가백년지계(國家百年之計)

치산치수(治山治水)는 국가의 백년대계이다. 산림이 울창한 곳에는 경제의 부가 있다. 그러나 수복지구에는 소위 인공(人共) 때에 남벌로 인한 황폐한 산야가 남아있다. 4월 5일의 식수기념일에는 이곳에서도 남한지구에서 묘목 25만 본을 구입하여다가 기념식수를 한 것이다. ‘국토보안은 산림애호로부터’라는 표어를 걸고서 군관민 청년단원과 학생들이 수복기념림에 식수를 하는 것이다. 군단장 이 장군께서도 막료들과 더불어 기념림에 손수 기념식수를 하시는 것이니 화기애애한 가운데 군관민은 혼연일체가 되는 것이다.

 

31.jpg 11) 총후치안(銃後治安)은 철벽(鐵壁)의 포진(布陣)

전선의 전투가 치열할수록 총후(銃後)의 국민들은 이층(二層) 굳센 단결과 전력증강에 매진하여야 한다. 국민의 단결력이 해이(解弛)해질수록 제5열(第五列)은 준동(蠢動)하는 것이다. 수복지구에 있어서도 간혹 교묘하게 양민을 가장하고 이따금 제5열이 잡입하여 염전사상(厭戰思想)을 고취하거나, 또는 정보수집, 모략방화 등을 자행하는 수도 있다. 원주민들은 과거 몇 해 동안에 진절머리가 나도록 공산주의자들에게 속아왔기 때문에, 이제는 아무런 감언이설(甘言利說)로 속이려고 해도 속지를 않는다. 오열분자나 첩자가 잠동하기만 하면 주민들은 군단 헌병대나 치안대에 고발해온다. 때로는 의외로 정치공작반의 거물이 걸려들기도 한다. 이북괴뢰의 지령을 받고 수복지구의 민심교란을 획책하려다가 발각되어 일망타진이 되는 수도 있다. 군단에서는 이런 경우에는 주민다수가 집합한 가운데 공개 군법회의를 개최하여, 그들의 죄상을 백일하에 폭로시키고있다. 치안대에서도 각면 요소에 지대를 설치하고 불면불휴(不眠不休)로써 오열색출에 매진하고 있다. 군단에서는 오열체포에 공로가 있는 이에게는 수시로 표창을 하고 있다. 그리고 군내치안대장은 김진하(金振河)씨로서 항시 진두에 서서 ○백 대원을 지휘솔하며 치안확보를 위하여 만전의 포진을 하고 있다.

 

12) 보내는 정성, 받는 마음, 하나로 얽힌 애국의 정

‘가는 말(言語)이 고와야 오는 곱다’는 속언이 있다. 견주어‘보내는 정성, 받는마음 하나로 얽힌 동포애의 정’이야말로 국제애 인류애의 인생본래의 정의(情誼)인 것이다. 후방에 있는 국민은 전선장병의 노고를 내 몸 처럼 여기고“어떻게 하면 일선장병들의 노고를 덜어줄 수있을까?”하고 따뜻한 마음씨를 쓰는가! 하면 일선 장병들은“우리 장병을 밀어주고 있는 국민들의 부담은 얼마나 과중하고 무거울 것인가?”하고 서로 안타깝도록 민족애의 사랑이 얽이어지는 것이다. 특히 이 수복지구의 주민들은 군단을 생명의 원천처럼 사고하고 애지중지하는 것이다. 극단을 조직하여 위문을 오는가 하면 농본국 수천 년 전해 내려오는 농악대를 이끌고 위문행각을 오는 때도 있다. 군용도로를 개수할 때면 부인회원들이 자진출역을 하고 부대가 출동할 때면 따뜻한물 한 모금이라도 데워다가 부어주는 이 땅의 어머니들…, 멀리 후방에서 음식물을 만들어 가지고 위문을 오는 단체가 차를 몰고 찾아온다. 군단에서도 될 수만 있다면 후방국민 특히 수복지구 주민들에게 물심양면으로 도와줄 수가 있다면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장병들도 여가만 있다면 수복지구 주민들의 농사뒷바라지를 도와주기도 하고 서적을 학생들에게 기증하며 남는 자재를 학교방면에 희사도 하여 이리하여 보내는 정성, 받는마음은 하나로 연결되어 아름다운 동포애의 꽃을 피우고 있다.

 

32.jpg 13) 신앙의 자유

‘주여 이땅에 평화를 주소서’북한괴뢰치하에서는‘종교는 아편’이라고 종교인을 잡아서 학살(虐殺) 유형(流刑) 억압하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다. 공산치하에서 종교의 자유라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유명한 빈센트 주교사건 같은 것은 세계를 진감시키지 않았는가? 그러나 대한민국치하에서는 신앙은 절대로 자유이다.

수복지구에 있어서도 물론 적극 포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신앙의 육성을 허여하고 있는 것이다. 군단 내에 진중교회를 설립하고 믿는 장병들은 삼일과 주일예배를 정성껏 드리고 있다. 때로는 후방에서 교우들이 심방(尋訪)하여와서 군민합동예배를 보는 때도 있다. “믿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의 것이요”(마태복음 1장 산상보훈)외치는 복음의 씨가 이 땅위에 천국을 달성할 기초가 되고 있다. 수복지구에서는 과거 6~7년간교회당이 폐쇄되었는데 우리군단이 수복하면서부터 신앙의 불길은 마침내 낙심했던 교우들에게 커다란 경성(警醒)이 되어 도처에 새로이 교회가 설립되고 있다. 속초에서도 얼마 전에 교우와 일반유지들의 찬동으로써 거대한 교당이 새로 건축되어 군단장 각하 임석 하에 성대한 헌당식이 거행되었다. 교당에는 자유의 종도 건립되어 남북통일을 위한 평화희구의 종소리가 수복지로 하여금 하느님의 나라를 이룩하도록 우렁차게 울리고있다.“ 주여! 이 땅에 평화를 주사이다. 아멘”

 

14) 거리의 천사(天使)

33.jpg ‘집 잃은 거리의 천사’전쟁에 따르는 부산물로서 기아와 질병이 발생하는 것은 고래(古來)로 의례이 따르는 일이거니와 전쟁고아가 생기는 것도 근대전에 있어서는 자연현상의 하나이다. 부모를 잃고 정든 보금자리를 소실한 후에 거리에 헤매는 가련한 거리의 천사들은 얼마나 될 것인가? 천진난만(天眞爛漫)한 이 어린이들을 돌아보지 않는다고 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국가의 인적자원을 확보하는 데도 그렇커니와 도의상으로도 이 문제를 등한이 방치할 수 없는 것이다. 수복지구에 있어서도 북한으로부터 흘러내려온 고아가 수백여명에 달한다. 청정무구(淸淨無垢) 한 점의 티끌도 없는 이 천사들을 버려둔다고 하면, 거리에서 구걸을 하는 깍쟁이 밖에 될 것이 무엇이냐? 양양과 낙산사 두 곳에 고아원이 설립되었다. 특지가들의 희사와 경영자들의 노력으로 근근이 유지되어 가고 있다. 이 아이들 가운데 성장한 후에 영웅걸사(英雄傑士)가 나지 말라는 법이 있을까보냐? 대정치가, 대학자가 아니 난다고도 못하리라. 복된 목숨길이 품고 무럭무럭 자라나는 불우한 고아들을 위하여 군단장 이장군은 물론이거니와 영부인께서도 수시로 고아원을 방문하고 어린이들을 돌보아주시기도 한다. 군단고문들도 이따금 선물을 가지고 이들을 방문하여 어린이들의 동무가 되어주기도 한다. 넓고 넓은 동해바다를 바라보며 미래의 파라다이스를 마음에 아로새기면서 어머니 아닌 어머니, 보모의 손에 자라나는 어린 고아들에게 복있기를…

 

15) 민간인의 구호시설

‘병든자는 무료로 시료(施療)’수복지구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문제는 시료문제이다. 병든자가 의약이 없어서 앉아서 죽기를 기다린데서는 20세기 현실에 있어 시대역행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민간시료 특히 전염병 예방과 같은 것은 군과 지대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므로 수복지구에 있어서는 군단산하에 민간인구호소를 설치하고 무료시료와 예방주사를 실시하고 있다.

 

16) 군단장 각하의 민정시찰

날로 늘어가는 수복지구 주민들의 복귀로 말미암아 양양 일원은 완연 도시를 이루고 있다. 집을 태우고 가족을 잃고 그래도 내 고향이니 찾아와야 하겠다고 모여오는 까닭에 인구가 가속도로 늘어가는 것이다. 불타는 염원이 무두 수복에서 북진을 외치고 있다. 이장군께서는 군무의 여가를 타서 수시로 민간인의 생활실정을 시찰하시는 것이다. “얼마나 고생들이 되는? 굶지는 않는가? 주택문제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 자녀들 학교입학이나 시키었는가? 병이나 죽지 않았는가?”하고 일일이 가정방문을 하시며 위로격려를 하는 것이다. 때로는 전답에서 일하는 농부들을 방문하고“올 농사는 잘되었소? 비료걱정은 안되시오?”하고 농부들을 위로도 하시고 부로(父老)들을 찾아서 건강여부를 타진도 하신다. 그리하여 인정장군의 칭송은 자못 높아가고 있다.

 

17) 명승과 고적

고래로 인걸(人傑)을 지령(地靈)이라고 산수미려한 동해바다 관동에서는 시인 학자와 재가가인(才子佳人)이 많이 났던 것이다. 율곡 선생같은 대정치가가 낳는가 하면 천하장사인 창해역사 여도령(黎道令)이 이곳에서 낳으며, 홍장(紅粧)같은 경국지색(傾國之色)도 이 땅에서 낳기 때문에 문학사상으로 유명한 송강(정철, 거금360년 전 선조 때 사람)같은 분은 관동별곡을 지어 이곳을 칭찬하였던 것이다. 그만큼 산자수명한 관동풍경은 팔경(관동팔경=강릉경포대, 통천총석정, 고성삼일포, 간성청간정, 양양낙산사, 삼척죽서루, 울진망양정, 평해 월송정)을 가지고 있다. 그 가운데 낙산사와 청간정이 수복지구 안에 있는데 그 중에 낙산사는 6.25이전에 이미 소련군이 나왔을 때 방화를 하였기 때문에 웅대한 묘우(廟宇)가 모두 초토(焦土)로 돌아갔고 청간정 역시 연구세심(年久歲深)하여 기와가 헐어지고 동량이 부휴하여 붕괴에 직면하였던 것을 이군단장님이 취임하신 이래로 자비심을 베풀어 군민유지와 상의하여 두 고적을 재건하기로 하고 4285년(1952) 8월 28일에 낙산사를 재건하는 공사를 착수하여 11월 22일에 낙성준공을 보았으며, 청간정은 금년 5월 5일에 복구개수공사를 착수하여 불일성사(不日成事)로 공사를 완료하였으니 승지강산(勝地江山)에 금상첨화격(錦上添花格)으로 명승고적을 보존하는 것은 온고지신(溫故知新)의 미풍을 길이 살리는 것이다. 낙산사는 거금 1,300여년전 신라문무왕(태종무열왕의 원자)때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부속건물로 의상대와 굴암자 사천왕상이 건재하며 극락보전은 소실된 것을 추후에 재건한 것이다. 이대통령 내외분도 친히 시찰하시고 찬사를 베푸셨으며 기념식수까지 하신 바가 있다. 청간정은 거금 350년 전에 군수 박모가 지금 건물을 창건한 것이 그간 수차 개수공사를 거쳐서 오늘에 이르렀다. 창건 기원은 신라 때에 영랑 술랑 등 사선이 이곳에 청유(淸遊)하였다는 것으로 정자를 지은 계기가 되었다고 전하여 지고 있다.

 

18) 어린이는 나라의 보배

“기쁘구나 오늘날 어린이날은 우리들 어린이의 명절날일세 복된 목숨 길이품고 뛰어노는 날 오늘은 우리들의 날”이상은 26년 전 어린이날을 제정할 때에 처음 부른 어린이날 노래이다. 어린이는 나라의 보배이다. 적을 쳐부실 때에는 호랑이같은 무서운 이군단장께서도 어린이를 대할 때에는 언제나 미소를 띄우시게 되며 그 순간에는 동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어린이날에 미인고문관을 대동하고 어린이들을 위무할 때에는 좋은 아저씨와 아버지가 되어서 어린이를 사랑하는 것이다.

 

19) 이형근(李亨根) 장군 인상기(김팔봉)

34.jpg 판문점에서 공산단과 휴전협의를 개시한 후 두 번째인가 한국군 대표로 이형근 각하가 문산(汶山)에 나가 있을 때 마침 나는 일선에 가는 길이라 서울에서 그때 이장군과 보좌관으로 나가 있는 김종문(金宗文) 대령을 만나게 되어 문산으로 찾아가려 하다가 예정을 변경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 후에 이장군은 제1군단장으로 전임되고 나는 1군단에 갈 기회를 얻지 못하였었다. 그러던 중 금년 1월 2일에 제2군단에서 제1군단에 도착하게 되어 처음으로 이장군을 대면케 되었다. 국군의 군번 제1호를 가진 이장군은 아마 처음 대하는 사람 누군든지 37,8세가량으로 추측하리만치 노숙해보인다. 이마는 약간 벗어지고 회화의 음조가 느리고 하여서, 실상연령보다 노숙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내가 이장군의 연령을 아는 것이 아니다. 판문점에 우리 국군대표로 주재하였을 때, 이제독이 남일(南一)에게“이 분은 대한민국 군대표 미스터 이”라고 소개하니까 이장군은 남일에게 “나는 아무개”라고 인사를 하였으나 남일은“아, 그러냐”고 하고서“자, 인제 회의를 시작하자.”고 이장군의 인사에 응대하지도 않는 냉담한 태도를 취하더라는 전문(傳聞)을 들은 일이 있다. 이장군이 인사를 건넨 것은 남북은 수이(殊異)하건만 동족으로서 통할 친절과 아량을 가졌음이리라. 이 점에 이장군의 특색이 엿보인다. 그는 은폐할 수 없는 충청도 선비이다. 듣건대 이장군의 고향은 공주이라 한다. 금년 1월 6일에 내가 서울로 향발하고자 1군단장실을 하직할 때 장군은 후방에 전언해주기를, 1은 유산층(有産層)은 군에 대해서 동정위문이 박약하고 오히려 빈한층 국민에게 동정과 위문심이 많으니 유산층의 반성을 바라는 것과 2는 양양이북의 군정지역 속으로 후방에서 탁류가 흘러들어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니 군정지구에 제발 모리(謀利) 간상배(奸商輩)가 들어오지 말아 달라, 이 두 가지의 전언을 나는 부탁받았다. 장군이 이 말을 할때에 나는 경청하면서 강직(剛直), 염결(廉潔)한 성격의 소유주인 것을 느끼었다. 고래로 전해 오는 말 가운데 “세상 사람들이 근심하기 전에 먼저 근심하고, 세상 사람들이 모두 즐거워 한 뒤에 이를 기뻐하는 자는 성인이니라”는 말이 있다. 진실로 이와 같이 자기인격을 완성해 가려면 심성의 부단한 연마가 필요할 것이다. 국군장성들은 비록 건군이래 연한이 짧다하나 그러나 그들의 경력은 상상을 초월해서 복잡다기하다 할 것이다. 이같은 환경가운데서 3년간 사지(死地)에서 단련된 장성들의 정신은 타의 추종을 허치 아니할 만한 그 무엇이 있을 것도 당연하다. 이장군의 원만해 보이는 품격 속에 갖추인 열일(烈日)같은 강직은 이같은 단련에서 온 것인 줄로 생각한다. 이장군의 원경밖에 모르는 내가 이 이상 더 인상기를 쓰는 것은 부당하다. -8.6-

 

20) 편집후록

양양군은 북위 38선 위에 위치한다. 과거 8년간 적마(赤魔)의 도량(跳梁)으로 황폐할 때로 황폐했던 곳이었다. 그러나 우리 영용(英勇)한 군단이 진격해온 이래로 이 고장 향토양양은 새로운 갱생을 보게 된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군단장 이형근 중장각하의 위대한 덕화의 소산이 아닐 수 없다. 밝아가는 모습을 널리 국내외 소개하고자 이 글줄을 만들은 것임을 밝히어 둔다. 봉의학인 기(鳳儀學人記)

 

 

3. 맺음말

한국전쟁 시기 수복지구 양양군의 실정이 담긴 이 책자는 1952년 1월부터 1953년 7월까지 1년 6개월간 수복지구 군정모습을 국내외 각계에 보여주기 위해 제작된 귀중한 수복지구 전쟁사료다. 이것은 제1군단 창립 3주년 기념호로서 1952년 제1군단장으로 부임한 양양수복지구 군정책임자였던 대한민국 국군 군번 제1호 제1군단장 이형근 중장의 업적을 중심으로 한글, 사진, 지도, 영문 등으로 편집하여 컬러판으로 제작하였다.

전쟁발발과 수복의 혼란시기에 이와 같이 잘 정리된 책자를 내기란 쉽지 않은 일인데, 양양군수복지구건설위원회와 양양군이 제1군단의 군정시기를 20여 항목으로 나누어 수복지구의 군사, 치안, 산업, 교육, 복지, 종교, 도로, 주택, 의료, 구호사업, 문화재복구 등 다양한 내용들을 전반적으로 기술하였다. 양양군은 1945년 8월 15일 해방이후 미군정의 지휘를 받았으며, 수복지구였던 관계로 제1군단 군정의 휘하에 놓였었다. 양양지역이 군정에 이르기 까지 당시의 상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괴뢰의 남침이 있자 임전태세를 갖추기 위하여 편성된 국군 제1군단은 1953년 7월 5일로서 만 3주년을 맞이하였다. 1951년 6월 2일 38선을 두 번째 돌파한 제1군단은 잠정적인 행정조치로 실시한 군정기의 중심 수행부대였다. 당시 수복지구 양양일원은 1951년 7월 4일 미제 8군사령부 행정명령 제34호 부칙에 의거하여 1군단이 군정을 실시하였는데, 속초읍을 포함한 양양군 8개읍면의 7만 명, 고성 간성지구를 제외한 수복지를 총관장하였다.

1951년 7월 5일 1군단 군정 수반은 양양군내 읍면자치위원회, 군자치위원회를 구성하고, 군관하지구 행정잠정규정을 공포하여 각리장과 읍면장 선거를 실시하였다. 또한 군민정 군수를 선출하였는데 초대민정관은 박종승(朴鍾勝)이 뽑혔으며, 각읍면협의원을 선출하였다. 이형근 군정 당시 1군단의 군정(軍政)의 목표는 주민생활 안정과 향상, 교육의 재건, 산업의 진흥 등으로 결정하였다. 양양 수복지구의 주민들은 제1군단을 위해 극단을 조직하여 위문공연을 하고, 마을농악대를 이끌고 와서 농악놀이를 하는 등 장병위문과 군정업무에 적극 협조하였다.

이후 1953년 6월 15일 제1군단예하 22사단과 25사단이 창설되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미제8군단사령관 테일러장군과 정부요인들을 대동하고 1군단을 방문하였고,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반대 양양군민총궐기대회에도 참석하였다. 1953년 5월 1일 폐허가 된 학교들을 공병대원들이 주민들과 함께 보수하였으며 책상이 없자 이형근 장군은 미군포탄 나무상자 4천여 개로 학생들이 사용하게 하였다. 당시 양양군 학교는 고등학교 2개교, 중등학교 3개소, 국민학교 14개소 계 19개 학교에 남녀학생수가 12,720명에 달하였고 교직원은 233명이었다. 수복지구인 관계로 북한지역 고아가 수백여명에 달함에 따라 양양과 낙산사 두 곳에 고아원이 설립하여 이들을 수용하였다.

또한 6.25이전 소련군이 방화를 한 낙산사를 1군단 공병대에서 1952년 8월 28일 낙산사 재건공사에 착수하여 11월 22일에 낙성준공을 보았고, 청간정도 붕괴에 직면하였던 것을 1953년 5월 5일에 복구개수공사를 착수하여 그 공사를 완료하는 등 문화유산의 복구에 노력하였다. 그리고 수복지구에서는 과거 공산치하에서 6~7년간 교회당이 폐쇄되었는데 제1군단이 이 지역을 수복하면서 양양교회가 설립되고, 4월 5일 식목일에는 25만개 묘목으로 수복기념림을 조성하는 등 치산녹화에도 힘썼다. 이때는 전쟁시기인지라 물자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빈한층 국민들이 오히려 국군에게 위문과 동정을 많이 하는 것에 대해서 재산이 많은 유산층의 반성을 촉구하고, 양양이북의 군정지역 속으로 후방에서 불순분자와 같은 탁류가 유입되는 것에 대하여 군정수뇌부는 우려하였던 것이 나타난다. 소설가 김팔봉 작가가 이형근 장군에 대한 인상기를 썼으며, 봉의학인(鳳儀學人:이름불명)이 책자 편집인임을 알 수 있다.

박종승 민정관은『양양군지』에 의하면, “밀양인으로 호는 기재(杞齋)이며 명문의 집에서 태어났다. 한문에 조예가 깊고 일제강점기에는 운수사업에 종사하였고, 해방후 인공(人共)의 불우(不遇)를 받고 세상을 한(恨)하며 생활고에 신음하였다. 수복후 중의(衆議)로 민정관(民政官)에 선출되어 양양군 민정관으로 수년간 군 행정을 맡아보았다. 그러나 운수불길하여 반신불수가 되어 수년 동안 고생하다가 1973년 83세로 사천리(仕川里)자택에서 운명하였다.”고 하였다.

김팔봉(金八峰,1903~1985)은 본명이 기진(基鎭)이며 문학평론가로서 1919년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도일하여 1920년 일본 릿쿄대학 영문학부를 중퇴하였다. 1923년부터 매일신보 등 17년간 기사생활을 하였으며, 6.25사변당시 공산군에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는 등 수난을 겪었다. 김팔봉이 이형근 장군 인상기를 쓰게된 사유는 파악할 수 없다.

속초시 장사동에는 이형근 장군 덕정비(德政碑)가 있는데 1952년 8월 15일 이형근 장군의 공을 기리기 위해서 세웠다. 1952년 강원도 속초시 장사동 313-1의 통천군 순국동지 충혼비 옆에 세웠는데 현재 동명동 영랑호 동남쪽 가에 위치하고 있다. 1952년 8월 15일 제1군단 전투지구 민중대표 13인의 발기로 당시 양양군 민정관 박종승(朴鍾勝)이 주도하였다. 본래 이 지역은 북한공산치하에 있었으나 제1군단장 이형근 중장이 부임하여 수복지구 재건에 공적을 쌓았기에 이를 기린 것이다. 또한 1954년 5월 10일 속초시 동명동 입구에 수복기념탑이 세워졌는데 동년 3월 속초읍장 김근식 등이 당시 1군단 민사처보좌관 전형윤 소령에게 건의하여 군정당시 1군단장 이형근 장군의 승낙을 얻어 수복을 기념하고 피난민의 향수를 달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이상에서 발굴 소개한 수복지구 양양군정관련 자료를 통해서 양양군 발전사의 한 일면을 살펴보게 된 것을 필자는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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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정룡 외『, 속초시거주 피난민정착사』속초문화원, 2000

2) 이형근(李亨根, 1920.11.1~2002.1.13) 대한민국 군인으로 초대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이응준의 사위다. 1920년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1942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종전 후 1945년 12월 5일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교신청을 하여 뛰어난 영어능력으로 UN으로부터 면제를 받았다. 1946년 1월 15일 1기로 임관하고 국방경비대 제2연대장을맡았다. 유엔군사령부에서 각국의 참모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대한민국 국군의 상징인 군번1번이 되었으며 1946년 5월1일 초대 조선경비사관학교 교장, 1946년 9월 국방경비대 총사령관 겸 육사교장, 1948년 2월 통위부 참모총장, 1949년 6월 제8사단장을 맡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 제2사단장, 1950년 10월 제3군단장, 1951년 8월 교육총장, 1951년 9월 초대 휴전회담 대표, 1952년 1월 제1군단장으로 양양군 수복지구 총사령관을 맡았다. 종전후에는 1954년 2월~1956년 6월 초대 합참의장, 1956년 6월 27일~1957년 5월 17일 제9대 육군참모총장, 1959년 8월 대장으로 예편하였다. 이후 행정개혁조사위원장, 주영국대사, 한국자유총연맹고문, 국정자문위원을 역임하고 1등수교훈장,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일제만주국에서 끈끈한 군맥을 다져 해방후 군부를 장악했으며, 5.16때 정치정면에 나서는 등 한국 현대사에서 국군의 기초를 다진 인물로 평가되며, 군정당시 제1군사령관으로 양양에서 활약하였다.

3) 위의 자료에 의하면 당시의 양양군은 총 8개읍면으로 속초읍, 강현면, 양양면, 서면, 손양면, 현북면, 토성면, 죽왕면 등 1읍 7개면이었다. 속초읍과 고성군 토성면, 죽왕면이 양양군에 군정소속이 되었다.

4) 김귀옥「, 잃어버린 또 하나의 역사 -한국전쟁시기 강원도 양양군 미군정 통치와 반성『」경제와 사회』여름호, 한국산업사회연구회, 2000, 30~53쪽

5) 김귀옥「, 속초와 군정(1951.8~1954.11)의 인연과 현대적 의미『」속초문화』제17호, 속초문화원, 2001, 50~54쪽

6) J.Osborne,"Field Report on Yangyang Gun, North Korea", Liaison Officer, USIS, 1951, pp.196~222, 김귀옥 위의 글 재인용“나는 이 지역이 많은 정보실험과 교육실험이 수행될 수 있는 곳을 대표한다고 생각하며 동시에 그곳을 계속해서 공백지역으로 내버려두는 상태에 대해 의문시한다. 물론 그 곳은 장막이 몇 마일뒤 밀리게 될 러시아제국의 주변부에 속하는 유일한 장소이다. 따라서 공산주의 행정연구와 공산주의 지역의 재건을 위한 절대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다.”

7) 「동아일보」1953년 10월 30일자, ‘수복된 이북 7개읍면 민정관 선출’“군정관하의 수복지구에서는 지난 10월 26일 읍면민정관 선거를 거행하였다. 동선거는 수복지구의 급속적인 재건에 수반하여 이의 유능한 인재를 선출한 목적으로 관할 해당 7개읍면에서 구민의 백% 투표로써 다음과 같이 민정관을 선출하였다 한다.…”

8) 김귀옥, 앞의 글 5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