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산문화24호

제22회 강원도 향토문화연구발표회 대상 수상 / 조선시대 양양부(襄陽府) 소동라령(所冬羅嶺)의 고찰(考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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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952회 작성일 2013-04-04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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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회 강원도 향토문화연구발표회 대상 수상>
조선시대 양양부(襄陽府) 소동라령(所冬羅嶺)의 고찰(考察)

발표자 : 양양문화원 향토사연구소
연구원 이기용

Ⅰ. 문제의 제기

소동라령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세종실록지리지』양양도호부편에“要害, 自本府西去麟蹄境所等羅 嶺三十六里”라는 기록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양양도호부편에는“소동라령은 부 서쪽 60리에 있으며 겹치고 포개진 산맥에 지세가 험하고 궁벽지다. 예전에는 서울로 통하는 길이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라는 기록이 있는 등 소동라령에 대한 역사기록들이 많이 남아 있음에도 소동라령(所冬羅 嶺)이 현재의 한계령이었다는 기록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역사 기록에 보면 분명히 오색령, 소동라령, 옛 한계령은 모두 다른 영이었다. 
그럼에도〈사진 1〉에서 보듯이 한계령(오색령) 정상에는 언제 누 가 세웠는지 알 수 없는 낡은 간판에“문헌상 가장 최초로 등장 하는 한계령에 관한 지명은 세종실록지리지(1454년)의‘소등 라령(所等羅嶺)’이다.---”라고 기록해 놓고 있다. 뿐만 아 니라 국가기관인 국토해양부 국토지리정보원에서 2008 년도에 발간한『한국 지명 유래집』에도 한계령이“옛날 에는 소동라령이라고 불리었다”1)라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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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모두 소동라령이 지금의 한계령이라는 출처는 밝히지 못하고 있다. 다만“설악산은 중추 가 되면 눈이 내리기 시작하여 여름에 이르러 녹으므로 설악, 설산, 설화산으로 불리었고 소동라령도 같은 뜻으로 지어진 이름으로 자연스럽게 한계령으로 바뀌었다”2)는 막연한 주장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인터넷에서‘소동라령’을 검색하면 현재의 한계령이 옛 소동라령인 양, 왜곡되어 급속하 게 퍼져나가고 있다. 
이에 지금까지 잘못 알려진 소동라령의 위치를 고지도, 문헌기록, 경계기록, 하천기록, 거리기록 등 을 통해 찾아보고 이를 토대로 현지를 실사도 해 봄으로서 잘못 알려진 소동라령과 한계령의 위치에 대한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아 우리의 향토문화로 재정립하고자 한다. 

Ⅱ. 소동라령(所冬羅嶺)의 위치 

1. 고지도(古地圖)를 통해서 본 소동라령 

소동라령과 오색령, 옛 한계령은 명백하게 다른 영(嶺)이었다. 이는 먼저〈표 1〉과〈지도 1〉고지도 (古地圖)들에 표기된 고개명칭을 보면 오색령, 소동라령, 한계령을 다른 위치의 영으로 함께 표시하고 있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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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들은 영동에서 영서로 통하는 백두대간을 넘는 영들이기 때문에 지도상에도 북에서부터 남으 로 순차적으로 표시될 수밖에 없다. 특히 지도는 한눈에 볼 수 있어 글로 기록된 문헌에 비해 영의 좌우관계를 그르칠 우려가 적다는 것이다. 그런데 위의 도표에서 보듯이 모든 고지도에서 소동라령은 오색령 남쪽 위치에 표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연수파(박달령)와 구룡령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 로 표기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소동라령은 오색령과 멀리 떨어진 구룡령에 더 가까운 영으로 지금의 한계령이 아님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2. 문헌기록을 통해서 본 소동라령 


『여지도서(輿地圖書, 1765년)』의 양양 관애편에는 오색령·필여령·소동라령·조침령·구룡 령·형제현·양한치 등의 일곱 항목이 순차적으로 나열되어 있다. 여기에 보면“오색령은 설악 남쪽 가지에 접하고 인제와 경계를 이룬다. 필여령은 오색령 남쪽가지에 접하고 있으며 춘천 기린계이다. 소동라령은 필여령 남쪽가지에 접해 있고 기린계로 서울로 통하는 길이었으나 지금은 폐지되었다. 조 침령은 소동라령 남쪽가지에 접하고 기린계이다. 구룡령은 조침령 남쪽가지에 접하고 있으며 강릉 금 천면과 경계를 이룬다”3)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관동읍지(1871)』양양 관애편에도“오색령은 설악산 남쪽가지에 접해있고 인제와 경계이 고, 필여령은 오색령 남쪽가지에 접해있고 춘천기린과 경계하며, 소동라령은 필여령 남쪽가지에 접해 있고 기린과 경계하며 과거 서울로 가는 길이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조침령은 소동라령 남쪽가지에 접해있고 기린과 경계한다. 구룡령은 조침령 남쪽가지에 접해있으며 강릉 금천면과 경계한다.”4)고 적 고 있다. 강원도『양양군읍지 2(江原道襄陽郡邑誌二)』에도“소동라령은 부 서쪽 60리에 있다. 즉 필 여령 남쪽 가지로 기린과 경계를 이루며, 옛날 서울로 통하던 길이였으나 지금은 폐쇄되었다”5)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종합하면 소동라령은 필여령과 조침령 사이에 있었던 영임을 확인할 수 있는데 반하여, 필여 령 북쪽에 위치한 현재의 한계령은 소동라령과 같은 영이 아님을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다. 



3. 경계기록을 통해서 본 소동라령


위 문헌뿐만 아니라『대동지지(大東地志)』1866년 양양 영로조(襄陽嶺路條)에는 연수파령·오색 령·필여령·박달령·소동라령·구룡령·양한치·소량치 등의 모두 여덟 개의 항목이 열거되어 있 다. 여기에서 소동라령(所冬羅嶺)에 대해“오색령, 필노령, 박달령 모두 서쪽 50리 인제계이고, 소동 라령은 부 서쪽 60리로 아주 험한 서울로 통하는 대로였다. 기린계이다”6)라고 적고 있다. 또한, 『만 기요람(萬機要覽)』군정편4(軍政編四) 관방(關防) 강원도편에는“양양영로(襄陽嶺路)는 오색령·필여 령, 기린통로는 소동라령·조침령, 구룡령은 강릉과의 경계, 형제현(兄弟峴)·양한치(兩寒峙) 모두 서쪽 통로다.”7)라고 기록되어 있고, 1829년에서 1831년 사이에 편찬된 것으로 보이는『관동지』 13권에는“영로(嶺路) 연수파령은 서북쪽 75리에 있으며 오색령·필노령·박달령은 모두 서쪽 50리 에 있는 인제계(麟蹄界)이다. 소동라령(所冬羅嶺)은 서쪽 60리에 있는 험한 절벽지로 경성으로 통하 던 대로로 기린계(麟蹄界)이다. 구룡령(九龍嶺)은 서남쪽 60리에 있으며 강릉계(江陵界)이다.”8)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이 모든 역사기록에서 소동라령은 춘천 기린계라고 하고 있어 현재의 인재군 기린면 진동리 를 경계로 하는 영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아래〈지도 2〉1834년도 지도인 청구요람에서 보듯이 귀둔까지는 인제현 관할이었으나, 기린면 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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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는 당시 춘천부 관할의 기린현에 속해 있었고, 구룡령 너머 홍천과 평창의 일부지역은 강릉대도호부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4. 하천기록을 통해서 본 소동라령 
『신증동국여지승람』인제현편 산천조와『연려실기술』별집16권 총지리, 다산정약용의『산수심원기』 등에 보면“미륵수가 하나는 소동라령(所冬羅嶺)에서 나오고, 하나는 소파령(所波嶺)에서 나오고, 하 나는 서화현(瑞和縣)에서 나오고, 하나는 기린현(基麟縣)에서 나온다.”9)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같은 시대의 대표적인 지도인〈지도 4〉김정호의『대동여지도』를 보면, 인제로 흘러드는 수 계는 금강산 일대에서 발원하여‘서화현’으로 나오는 수계, ‘소파령’일대에서 발원하여 원통으로 흐 르는 설악산 수계, 오대산 일대에서 발원하여‘기린현’을 거쳐 나오는 수계, 그렇다면 나머지 한 수계 는 점봉산 일대에서 발원하여 귀둔지역을 경유하여 나오는 수계로 이 수계가 소동라령 수계일 수밖에 없는 바, 그렇다면 소동라령은 위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 기린현 진동리를 거쳐 곰배령과 귀둔, 하추 리, 고사리, 합강정을 거치는 경로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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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1767년의『인제현 여지도』, 1776년『인제현 지승』지도, 〈지도 5〉1800년『인제현 광여도』등에 서도 소동라령은 현재의 한계령이 아닌, 귀둔고관묘, 추동, 고사촌, 임선대, 합강정, 인제현으로 이어 지는 영로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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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양양지역의 하천기록을 보면, 『신증동국여지승람』44권 양양도호부편에“남대천(南大 川)은 부 남쪽 2리에 있는데 강릉부 오대산(五臺山)에서 나오며 소동라령(所冬羅嶺) 물과 합치고 부 남쪽을 지나 바다로 들어간다.”10)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 양양남대천의 본류는 오대산이며 구룡령과 오색령에서 내려오는 물줄기에 북암령에서 나오는 물줄기와 합류하여 내려오다 읍내에서 오대산 본 류와 합류하여 바다로 들어가므로 소동라령은 현재의 북암령을 경유해 기린현 진동리와 귀둔으로 이 어지는 영로였을 것임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5. 거리기록을 통해서 본 소동라령

지금까지 고지도와 각종 문헌을 확인한 결과 소동라령은 박달령(연수파)와 조침령 사이에 위치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일부 고지도와 기록에서 양양부에서 소동라령까지의 거리를 60리 라고 하고 있으나 이는 당시에는 거리를 측량하는데 한계가 있었으므로 잘못된 기록을 답습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세종실록지리지(1454년)』강원도 강릉대도호부 양양도호부편에“소동라령”을“소등 라령(所等羅嶺)”이라 표기하고“소등라령은 요해처(要害處)로 양양부(府) 서쪽 인제경계로 36리”라고 기록하고 있으며,11) 1923년『양주읍지(현산지)』에는“소동라령은 부에서 서쪽으로 30리”12)라고 기록 하고 있다.
이는『여지도서』와『관동읍지』관애편에 오색령은 50리, 필여령은 40리, 조침령은 45리라고 한 점 에 비추어 백두대간 능선의 지형으로 볼 때, 필여령과 조침령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는 소동라령은 당 연히 양양부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을 수밖에 없으므로 위의 양양부에서 30리에서 36리가 맞는 기록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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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소동라령과 소어령, 북암령 

그렇다면 지금까지 밝혀진 역사기록들을 바탕으로 소동라령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보고자 한다. 남효온(南孝溫1454~1492)의『유 금강산기』를 보면“(낙산사에서) 20리쯤 가서 양양부(襄陽府) 앞 의 냇가에 이르러 말을 쉬게 하였다. 또 10리를 가서 설악에 들어가 소어령(所於嶺) 아래 고개에 오르 니, 냇물은 왼쪽에 있고 산봉우리는 오른쪽에 있다. 산기슭을 다 지나 냇물을 건너 왼쪽으로 가니, 산 은 맑고 물은 빼어나며 흰 바위가 서로 포개진 것이 대략 금강산 대장동(大藏洞)과 같다. 물줄기를 따 라 올라가서 오색역(五色驛)에 이르니 산의 달이 이미 흰빛이었다.”13)라고 기록되어 있다.
양양에서 오색으로 향하노라면 중간쯤 지점에 반드시 거쳐야하는 고개가 있다. 일명 발딱고개라고 하는데 예전에는 한령(寒嶺)이라 불리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보이는 마을이 송어리와 송천 리이다. 이는 일본인들이 만든 지명으로 지금도 옛 지명인 소어(所於), 소래(所川)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두 마을 사이에 있는 마을이 북암리로 인제 진동리로 연결되는 대로의 옛 고갯 길이 있다. 지금은 북암령이라고 불리고 있으나 이 고개의 옛 지명이 소어령, 소동라령이었다. 이는 박달령이 일본식 한자인 단목령(檀木嶺)으로 바뀌었듯이 북암령이라는 지명도 1916년 행정구역 폐합 에 따라 북애미14)를 일본식 한자인 북암리로 고친 후, 영의 이름도 일본식 지명인 북암령으로 고친 것 으로 보인다. 이는 대로인 옛길은 있는데 고지도에는 소동라령만 있을 뿐 소어령이나 북암령이라고 표기된 영이 없기 때문에 소동라령의 다른 이름임을 짐작할 수 있다. 『유 금강산기』의 남효온선생도 소어령 아래 고개를 지나 오색으로 갔다고 하고 있어 소동라령 아래 한(寒)고개나 망령(望靈)고개를 지나 오색으로 갔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종합해보면〈지도 7〉에서 보듯이 소동라령은 양양에서 남대천을 따라 올라오다 망령고개(望靈 峙)나 한령을 넘고 소천이나 소어리를 거쳐 지금의 북암령을 넘어 기린현내 진동리와 곰배령을 거쳐 귀둔, 추동, 고사촌, 합강정을 경유해 인제로 연결되는 영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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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현지 실사를 통해서 본 소동라령 

『신증동국여지승람』제45권 강원도(江原道) 간성군편에 보면“미시파령(彌時坡嶺)은 고을 서남쪽 80리 쯤에 있다. 길이 있으나 예전에는 폐지하고 다니지 않았는데 성종(成宗) 24년에, 양양부 소동라 령(所冬羅嶺)이 험하다 하여 다시 이 길을 열었다.”15)고 적고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양양부 산천조 에도“소동라령(所冬羅嶺)은 부 서쪽 60리에 있으며 겹쳐지고 포개진 산맥에 지세가 험하고 궁벽지 다. 예전에는 서울로 통하는 길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16)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소동라령으로 추정되는 북암령을 실사한 결과 귀둔(耳屯,耳呑)에서 진동리로 연결되는 곰 배령은 텔레비전 드라마의 영향으로 이미 옛길 탐방코스로 변해있었고 진동리 삼거리에서 북암령 정 상까지는 고개가 완만하며 일부 도로는 유실되었으나 옛길의 도로폭도 2m정도로 우마차가 다녔음직 한 대로였으며, 정상에는 위에 이정표를 세웠음직한 돌무지가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6척(尺)을 1보(步), 360보를 1리(里), 30리를 1식(息)이라고 하고 10리마다 작은 표식을, 30리마다 큰 표식을 세우 며, 30리마다 역을 1개소씩 설치하도록 규정하였고, 일정한 거리마다 돌무지를 쌓고, 장승을 세워 도 로의 리수와 지명을 기록한 도로표지를 설치하였다.”고 한다.17) 영 정상의 돌무지는 정상 주변에는 돌이 없고 돌의 규격도 고른 것으로 보아 일부러 돌을 옮겨 쌓은 것으로 보여 국가에서 관리하던 영로 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고, 양양에서의 거리가 30리였음도 짐작할 수 있었다. 정상에서 북암리 방향은 급경사였고 계곡을 따라 길이 형성된 관계로 폭우로 많은 구간이 유실되어 있었으나 나라에서 영로를 폐지한 지 600여년이 지났음에도 많은 구간에 도로의 형태가 남아있었고, 노폭은 서쪽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2미터 이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북암령을 접어들기 위해서는 양양에서 한(寒)고개(발 딱고개)나 망령고개까지 넘어야 했으므로 지세가 험한 궁벽지라는 기록을 실감하게 했고, 국가의 영 로로서 비만 오면 유실되는 급경사인 소동라령을 관리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국가에서는 소동라령을 폐지하였음에도 지역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조선말까지도 일반인들 은 이 영을 많이 이용했다고 하고 있으며 이를 입증이나 하듯이 1911년 조선지지자료를 바탕으로 만 든『강원도 땅이름의 참모습』인제편 영치현명(嶺峙峴名)에 보면 곰밴령(丁嶺, 곰배령)을 양양으로 통 하는 영로라고 기록하고 있고, 여행자들이 민가에서 자야하는 불편을 덜어주기 위해 국가에서 관장하 던 원(院)이 조선후기에 들어가면서 그 기능이 쇠퇴하자 주막(店舍)이 그 역할을 떠 맞게 되었는데 길 손들이 먹고 자던 주막이 진동리에 갈터주막, 삼거리주막, 귀둔리에 버덤말주막, 곰배골주막, 하추리 에 가래울어주막, 당수터주막, 원대리에 안삽재주막 등 이 구간에 특별히 주막이 많이 남아 있었던 것 으로 보아 얼마나 길손들의 많은 영로였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Ⅲ. 옛 한계령의 위치
위에서 우리는 지금의 한계령이 소동라령이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고 소동라령의 위치도 확인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한계령이 옛날의 한계령은 맞는 것일까? 
조선시대에도 한계령이라는 지명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옛 한계령의 위치를 찾아 바로 잡는 일 또한 중요하다고 본다.


1. 역사기록으로 본 한계령
『대동지지』강원도 인제현 영로편에“連水坡嶺東 七十五里杆城界迂回絶險五色嶺弼奴嶺朴達嶺俱東 七十里襄陽界”라고 쓰고 상단 여백에 所冬羅嶺, 寒溪嶺”이라고 쓰여 있는 바, 『대동지지』의 전반 적인 기록형태를 보면 쓰는 과정에서 누락된 부 분을 상단에 추가로 기록하고 있어 당시에 오색령 과 함께 한계령도 다른 곳에 있었다고 봄이 타당 하다. 
그런데 1959년(단기 4292년) 인제군 북면에서 작성 보고한 지명조사철18) 을 보면 한계령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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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과 통하는 오색이영의 나즌 영으로서 한계지역에 있다 하여 한계령이라고 하나 오색이영이라고도 함”이라고 보고하고 있어 현재의 한계령(오색령)은 옛 한계령이 아니며 옛 한계령은 한계지역에 있 는 오색령 보다 낮은 영으로서 넓게는 오색령의 일부임을 알 수 있고, 일제가 만든 지도에는 오색령을 한계령이라고 적고 있음에도 인제지역에서는 해방 후인 1959년 당시에도 현재의 한계령은 오색령으 로 불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옛 한계령의 위치를 찾아보자. 
한계령의 위치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지도일 것이다. 그런데 고지도를 보면 양 양에서 오색역을 거쳐 인제로 연결되던 대로인 오색령은 모든 지도에서 볼 수 있으나, 이용이 많지 않 았던 한계령은 유일하게 동여도에서 볼 수 있다. 
그런데〈지도 8〉동여도에도 오색령과 한계령은 다른 영로로 함께 기록되어있으며 오색령은 고대로 (古大路)라고 표기되어 있다. 뿐만아니라 한계령은 오색령보다 더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백담천을 거쳐 남교역과 연결되고 있는 것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남교리에서 계곡을 타고 오르다 한계산(산성)의 정상인 안산과 귀때기청봉으로 이어지는 경로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김몽화의『유설악록』에서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김몽화의『유설악록』을 보면“대승령에 올라 돌아보니 어젯날 만경의 오세암, 남대의 영시암, 좌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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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의 만경 모두 무릅 아래요, 봉정암이 앞을 가리고 있어 밑은 볼 수 없었다. 산허리 10리에 참으로 한계의 관폭대에 오르니 구천은하(九天銀河)라고 크게 네 글자가 새겨져있다. (생략) 관폭대 아래의 길은 아주 험준하여 갈수 없고 많은 돌들이 이빨처럼 쪼개져 겁나며 장차 갈라져 떨어질 것같이 그윽 하게 세워져있어 혹 이런 꿈을 꾸지 않기를, 한계령을 향하다가 아름다운 수석을 만난 곳에서 가마를 세우고 쉬면서 개울물을 떠 마시고 물에 밥을 말아먹었다. 개울에 큰 바위와 바위의 좌우에 단풍이 비 치므로 정차암이라고 청하여 불렀다. 오색이라 하는 이 영을 넘으니 석봉의 기풍이 힘 있게 나열된 설 악산의 한가지다. 여기에서 묵으니 오색촌이다.”19) 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서 관폭대 아래의 길은 험준하여 갈수가 없다고 하고 있고, 한계령을 향했다고 하고 있으므 로, 한계천(장수대, 한계사가 있던 곳)으로 내려와 오색령을 넘은 것이 아니라 대승령에서 능선을 따 라 귀때기청봉으로 향하는 경로로 오색령을 넘어 오색에 이르렀다고 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계령은 대승령에서 귀때기청봉, 오색령으로 연결되는 코스에 있다고 본다.


2. 한계령이 고지도에 나타나지 않는 이유
한계령은 동여도 이외의 고지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허목(許穆)은『동유박물(東遊搏物)』에서“한계(寒溪)의 남쪽 봉우리는 절벽이 위험한데 그 맨 위는 몹시 높고, 그 아래는 더욱 깊다. 산석(山石)의 빼어난 정기는 높고 험하여 명상(名狀)하기 어렵다.”고 했고, 김몽화는『유설악록』에서“관폭대에 오르니 구천은하(九天銀河)라고 쓰여 있다”고 했으며 정약 용의 산수심원기를 보면“한계산기(寒溪山記)에 이르기를 한계산은 높고 크며 기이하고 절승하여 영 동(嶺東)의 으뜸이다. 산 위에 성(城)이 있고 물이 있는데, 그 물이 성안으로부터 흘러나와 폭포를 이 루어 그를 대승폭(大勝瀑)이라 하며 수백 길 높이에서 현류(懸流)하여 바라보면 마치 흰 무지개가 하 늘에서 드리운 듯하다. 원통역(圓通驛) 동쪽으로부터 좌우가 모두 큰 산으로서 골짜기가 깊숙하고 시 냇물이 종횡으로 흘러 돌다리를 건너는 곳이 서른여섯 굽이나 된다. 빽빽하게 들어선 나무는 하늘을 찌를 듯 위로만 솟아 옆으로 뻗은 가지가 없으며 그 중에도 송백이 더욱 높아 그 끝을 볼 수 없다. 또 그 남쪽 봉우리의 절벽은 1천 길이나 깎아질러 그 기괴함을 형언할 수 없는 형세라, 나는 새도 능히 건널 수 없으며 행인들은 곧 바위덩이가 떨어져 눌릴 듯한 공포를 느낀다. 그리고 그 밑에는 험한 암 석으로 못을 이루었는데 사람이 앉을 만한 반석도 있다. 또 동쪽 몇 리 길은 동구(洞口)가 몹시 협착 하고 좁은 길은 벼랑을 끼고 돌아가는데, 암석은 입을 벌린 듯 함하하고 산봉우리는 뾰족뾰족 빼어나 마치 용이 후려치고 호랑이가 덮치듯 누누이 층대를 이룬 것이 무수하다. 그 수맥은 모두 곡담 (曲潭)ㆍ한계(寒溪)의 근원이다.”고 하였듯이20) 이 도로는 안산(한계산성)에서 대승폭포, 귀때기청봉, 소승폭포로 이어지는 기암 절경지로서 예로부터 풍류객들이 즐겨 찾던 이 구간에 있었던 영이 한계령 으로 일반인들은 길이 험하여 주로 이용하지 않았으므로 일반적인 고지도에는 표기하지 않았다고 봄 이 타당하다.

Ⅳ. 한계령이 오색령인 근거들 

1. 한계령의 옛 지명은 소솔령 

우리는 소동라령이나 한계령은 지금의 한계령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한계령 인 옛 지명을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1589년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한 팔곡 구사맹(八谷具思孟)의『팔곡집(八谷集)』에 한계산(寒溪山) 시 (詩)의 주석(註釋)을 살펴보면“양양에서 소솔령(所率嶺)을 넘어 인제로 이어지는 많은 사람들이 한계 사(寒溪寺: 장수대 인근의 절)에서 투숙함으로 이들을 접대하기 힘들고 감내할 수 없어 스님들이 절 을 버려두고 떠나 절은 허물어져 빈터만 남아있다···”21)라고 적고 있다. 또한, 추강 남효온(秋江 南孝溫, 1454~1492년)의『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에“오색역(五色驛)을 출발하여 소솔령(所率嶺)을 올라 여기를 소금강산이라 부르는 것이 빈말이 아니구나, 하고서 영(嶺)위에서 동해를 하직하고 원통 을 지나 인제현(麟蹄縣)에서 묵었다."22)라는 기록이 있다. 이를 종합하면 오색에서 장수대(한계사)를 지나 인제를 통하는 지금 한계령의 옛 이름은 소솔령이었다.

2. 소솔령이 오색령인 근거 

문헌에 오색령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 찾을 수 있다. 선조실록 권 72(宣祖實錄卷七十二) 1596년 2월 1일(戊戌)에 비변사(備邊司)가 아뢰기를“적병이 경상도의 영해(寧 海) 연해를 따라 북상하게 되면, 평해와 울진이 가장 먼저 적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곳을 만약 지키지 못하여 적병이 깊숙이 영동(嶺東)으로 침입하면, 추지령(楸池嶺)·미수파[(彌水坡)·오색령(五色嶺)· 백봉령(白鳳嶺) 등의 곳은 모두 영(嶺)을 넘는 길이 될 것이니, 방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23)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토록 이용이 많았던 소솔령(所率嶺)이라는 고개명은 이때부터 모든 기록과 지도에서 사라지고 오 색령(五色嶺)이라는 지명이 등장한다. 
이는 임진왜란을 치르면서 복잡한 고개명칭(소파령, 소솔령, 소 어령,소동라령 등)의 혼돈으로부터 오색역을 이는 김수증(金壽增)의『한계산기(寒溪山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691년(辛未) 5월 9일(甲午)의 기문(記文) 중에“한계사(寒溪寺) 옛터를 지나니 북쪽편의 모든 산봉 우리들은 곧게 솟아 있고, 나무들이 무성하여(생략) 개울가 돌 위에서 점심을 먹고서, 지나가는 스님 을 만나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니 곧 대답하기를 오색령(五色嶺)을 경유하여 양양(襄陽)으로 가는데 거 리는 약 80리가 된다.”24)라고 기록되어 있다. 위에서 우리는 양양에서 오색을 거쳐 한계사 터를 지나 인제로 가는 영이 소솔령임을 기록을 통해 확인했었다. 그런데 한계사 옛터를 지나면서 지나는 스님 에게 어디를 가느냐고 물으니 오색령을 거쳐 양양으로 간다고 하고 있다. 이로서 소솔령이 오색령으 로 이름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양와 이세구(養窩李世龜)의『양와집(養窩集)』에 1691년(辛未) 10월 3일(甲申) 동유록 (東遊錄)에도“조침령의 북쪽은 오색령이고 그 동쪽은 양양(襄陽)이고 서쪽은 인제이며 오색령 북쪽에 미시파령을 이룬다.”라고 적고 있으며25) 식산 이만부[(息山李滿敷)의『금강산총기』서두에“대 체로 우리나라의 산은 백두산에서 비롯되었으며 백두산(白頭山)의 낙맥(落脈)이 남으로 흘러 철령에 이르며 남북의 경계를 이룬다. 이곳에서 동으로 흘러서 추지령·쇄령·온정령 등 세 고개가 팔백리를 관통하며, 온정령에서 남쪽으로 삼십리 지점이 금강산이다. 금강산은 동해 바다를 따라 백리를 내려 가 진보령이 되며 진보령에서 오십리를 더 가면 석파령, 그곳에서 삼십리를 더 가면 미치령, 다시 육 십리를 가면 한계산이 되고, 다시 삼십리를 가면 오색령에 이르며, 이곳에서 구십리를 가면, 오대산에 이르고, 삼십리 거리에 대관령이 되고, 사십리 거리에 백복령이 되고, 백리 거리에 태백산과 황지가 된다. 이것이 금강산을 중심으로 한 그 위 아래의 형승이 막히고 험준한 모습의 대략이다.”26)라고 적 고 있다. 
『증보문헌비고』양양 산천편(襄陽山川編)에“양양 오색령은 서쪽 50 리에 있다. 산의 총설에 나타나 있다. 영로(嶺路) 오색령은 양양영로로 필여령과 함께 서로이며, 소동라령·조침령, 구룡령은 강릉로, 형제현, 양한치 모두 서쪽로이다. 인제 영로(麟蹄嶺路)는 미시령·흘이령·탄둔령·두모치·건리 치·오색령·서파령·가노치·진보령이다.”27)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입증하듯이 앞에서 본 고지도들에서도 소솔령과 오색령이 함께 표기된 지도는 없으면서도 모 든 고지도에서 소솔령이 사라지고 오색령이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이 한계사에 투숙객이 많아 이를 감내할 수 없어 절을 버리고 떠날 정도로 이용객이 많았던 소솔령 지명이 모든 지도에서 사라졌다면, 문헌상에 필여령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모든 지도에서 빠지지 않고 나타나는 오색령이 과거의 소솔령이 분명하다고 할 것이며 오색령 은 당시에도 양양과 인제를 연결하는 가장 중요한 영로로 지금의 한계령임을 알 수 있다.

Ⅴ. 맺음말
고지도, 각종 문헌 등을 확인한 결과 과거의 소동라령, 오색령, 한계령은 일부의 주장과 달리 모두 서로 다른 영들임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소동라령은 고지도, 고문헌, 경계기록, 하천수계, 양양부에서의 거리기록, 현지답사 등을 종 합한 결과 현재의 오색령이 아니라, 필여령 남쪽 가지에 위치한 춘천 기린계로 연결되는 영으로, 양양 에서 한령이나 망령고개를 넘은 후 소어리나 소래를 거쳐 지금의 북암령(일명 소어령)과 춘천 기린계 였던 진동리, 곰배령(곰밴고개), 귀둔, 추동, 고사리, 합강정, 인제로 이어지는 영로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옛 한계령은 일반인들이 많이 이용되지 않던 고개인 관계로 동여도에만 설악산과 오 색령 사이의 백담수를 거쳐 남전역으로 연결되는 고개로 표시되어 있어, 김몽화의 유 설악록과 연결 시켜 볼 때, 남교리에서 한계산성(안산), 대승폭포, 귀때기청봉을 지나는 능선을 통해 오색으로 이어 지는 고개였음을 추정해 볼 수 있었다. 
또한, 현재의 한계령(오색령)은 과거 소솔령임을 확인할 수 있었고 양양과 인제를 잇는 주도로로서 이용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음을 기록을 통해 알 수 있었으며 그 후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비슷한 영의 이름(소파령, 소어령, 소동라령 등)이 가져오는 혼란을 막기 위해 오색역을 지나는 영인 소솔령을 오 색령으로 부르게 되었고, 이는 모든 고 자료에 소솔령이 사라지고 오색령이 나타나고 있음도 확인할 수 있었다. 
역사는 좋던 나쁘던 간에 사실대로 남겨 후손들이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므로 분명한 역사기록이 많이 남아 있음에도 특정 목적을 위해 이를 왜곡시키는 일은 없어야 한다. 특히 지명은 옛 문화를 간직한 인문학적 유산임을 감안할 때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후손에 물려주 는 정신은 오늘을 사는 우리의 책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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