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28호

문화원회원교육(특강) : 인문학 문학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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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379회 작성일 2017-03-13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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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원회원교육(특강) : 인문학 문학이야기


양언석 교수



[1]


많은 예술 작품 중에서, 이 작품만큼 심각하게 고뇌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이것이 인문학의 시작이다. 인문학은 물음에서 시작한다.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나의 문제에서 시작하여, 나의 문제로 마무리 합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먹고살기 위해, 인간성을 상실하고, 돈 버는 기계처럼 살고 있지 않은지 고민해 봐야 한다.
이런 현실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찾아주는 것이 바로, 인문학이다.

우리 사회는 1990년부터 인문학의 위기라는 문제가 제기되면서 2000년대 그것이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인문학을 전공한 교수들은 인문학의 위기를 오래전부터 말하고 있다. 문. 사. 철의 전통적인 과들이 대학에서 그 지위를 잃고 위기를 말하고 있다. (예를 들면 지방에 있는 대학-인문학과가 없다.-우리 사회는 인문학하면 돈 안 되는, 배고픈 학문으로 생각)교육청책이 엉터리다. 한심하다.


그런데
2010년 스티브잡스가 아이패드를 내놓으면서 애플의 성공비결이, 인문학과의 융합이라고 말했다. 아이폰으로 2016년 상반기 세계최고의 수익을 얻은 애플의 수장이, 성공의 비결로 인문학을 들었다. 이에 우리나라의 많은 기업가들이 깜짝 놀랐다. 왜? 인문학을 무시하는 현실에서 당연한 반응이다.
스티브잡스가 왜 인문학을 중시하였는가? 그것은 제품을 사용하는 대상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돈을 벌기 위해 제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 제품을 만들면서 세계적으로 성공하였다. 돈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 만든 아이폰은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가습기 살균제-21세기에 말이 안 된다.-인간을 위해 제품을 만든 것이 아니라, 돈을 위해 제품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장사를 잘 하려면 인문학적으로 해야 한다. 장사를 못하는 사람이 과일을 판다면, 이렇게 합니다. “이 사과 싱싱하고 맛있고, 무척 답니다”
하지만 장사를 인문학적으로 잘 하는 사람은 이렇게 합니다. “저번에 다리 아프신 거 괜찮으세요?”,“ 아이들 잘 커요?” 인간적으로 장사를 한다.


스티브잡스가 2010년 신제품 발표회에서 인문학으로 결합된 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그것은 기술과 인문학이 단순히 매카니즘으로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 인간에게 어울리는 제품을 개발하기 위해서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인간을 위한 제품, 이런 기업은 성공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왜 인문학에 관심을 갖는가? 스티브잡스가 아니더라도 근본적으로, 지금, 한국사회는 인문학을 원한다. 인문학을 원하는 이유는, 복잡한 사회, 그리고 미래를 예측하기 어려운 현실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행복이 뭔지?를 제공하는 것이 인문학이기 때문이다.
행복하고 싶다면 인문학을 배워야 한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심이 있다면 인문학을 배워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나와 세계의 문제이다. 나와 세상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왜, 내가 세상이고, 세상이 나이기 때문이다.

현대사회는 돈이 최고의 선이고, 돈이 신앙화 되어 가고 있다. 하지만 돈 많은 재벌이나 권력자들이 돈 때문에 수갑을 차고 감옥 가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돈이 최고의 선은 아니다.


누구나 행복을 꿈꾸지만, 모든 사람이 행복할 수 없다. 누구나 행복한 삶을 찾아 항상 길을 떠난다. 그 길에서 많은 것을 만난다. 태양, 바람, 태풍과 비바람 등


결국은 행복은 깨달음이고, 깨달음 속에 행복이 있다.

깨달을 수 없다면, 평생을 방황해야 한다.


결국 나는 행복한가? 라는 답은, 내가 살아있어서 행복하고, 함께 할 가족이 있어 행복하고, 벗이 있어 행복하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이 행복을 멀리서 찾으려 하고, 남에게서 찾으려고 한다. 행복은 내 마음 속에 있다. 남의 떡이 커 보이는 사람은 평생 남의 떡만 찾는다. 내 떡이 커 보인다면 행복한 사람이다.


행복의 적은, 탐욕과 경쟁심이다. 인문학의 적도 탐욕과 경쟁심이다. 그러므로 인문학과 행복은 같은 말이다.

문학을 배우는 이유는, 인간답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이다. 여기서 산다는 것은 경제적 풍요나 편안한 삶의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 창조적인 삶, 절대적인 행복과 자유, 삶과 진리추구를 진정한 삶이라고 한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첫째 인문학은 상상력과 지성의 힘.


상상력이 없었었다면 인간은 어떻게 되었을까? 원시적인 삶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인류의 삶은 상상에 의해 발전이 시작되었고, 상상으로 고도의 문명사회가 되었다.
땅을 달리고, 하늘을 날고 싶었던 동화적 상상력이, 차와 비행기를 만들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상상력이 없었다면 인류는 원시적인 삶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원시사회에서 원시인들은 하늘을 날고 세상을 달리고 싶었던 상상력이 지금의 문명사회를 만들었다. 이 상상력은 인간을 위한 새로운 창의력으로, 창의력은 상상의 소산이다. 인류는 상상력으로 물, 불, 바람을 통해 신을 만들고, 역사를 만들면서, 문명사회로 발전을 거듭하였다.
10년 전 만해도, 손에 컴퓨터를 들고 다니면서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 못했지만 인간의 상상력이 결국 공상이 아니라 현실을 만들었다.
인간의 상상력으로 인해 신화, 역사, 문화가 인류를 위해 존재하며 국가조직과 이성적인 정치형태로 발전하였다. 그러므로 상상력은 인문학의 결정체이다. 그러나 이 지성의 힘과 상상력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문학적 상상력에 의해 시작한다.


상상력으로 꿈을 꾸고, 이 꿈을 이루는 것은 자유로운 사유에서 시작한다. 구속받지 않고 자유로이 자신의 세계를 꿈꾸는 상상력은 미래 인간을 위한 자산이다. 인문학의 동화적 상상력은 하늘을 날고, 세상을 달리는 희망이 현실에서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은, 인문학의 존재이유이다. 이러한 상상력은 벽에 부딪히고 부정적으로 평가받을 수 있지만 이러한 남다른 차이가 인문학의 토대이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두 번째는
더 멋진 삶의 여행을 위해.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야 할 미래가 어떤 모습인지 모르면서 매일매일 살아간다. 무척 아쉽게도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한번 밖에 살 수 없다. 두 번만 살 수 있다면 멋있게, 후회 없이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 번은 원칙대로 살아보고, 두 번째는 파격적인 삶을 살고 싶다. 어떤 파격적인 삶을 어떤 것일까?


예를 들면, 말기 암환자가 죽기 전에 가장 후회한 4가지.
1) 사랑하는 사랑에게 고맙다는 말을 많이 했더라면...
2)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했더라면...
3) 조금만 더 겸손했더라면...
4) 좀 더 친절을 베풀었다면...


*나와 다른 삶을 살았던 사람들의 경험은“문학”에서 찾을 수 있고, 과거의 사람들이 경험했던 시행착오는 “역사”속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또 철학은 모두를 관통하는 가장 본질적인 규칙을 찾아내는데 헌신한다.


인문학을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것은, 어느 학문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왜, 삶의 원리를 제대로 가르쳐주고 그 원리를 활용해 남은 생을 의미 있고, 보람 있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가이드도없고, 그 모두를 스스로, 일일이 겪으며 살아가려면 삶의 얼마나 고단할까?
그런데도 우리의 교육은 어떤가? 삶에 그다지 도움이 안 되는 200년 전의 사실을 외우거나 10년 후 소용도 없는 지식을 외우느냐고 그 소중한 시간들을 허비하고 있다.
이렇게 교육을 받고 막상 사회에 나가면, 무릎이 깨지고, 길을 잃고, 상처를 받은 후에야 무엇이 잘못되었다고 느끼게 된다. 그래야 그제서야 세상에 기여하고, 자신이 삶을 꽃피우는데 써야 할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삶의 의미를 찾는데 방황하는데 쓰게 될 것이다. 이 시대 많은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듯이 말이다.
삶의 경험, 나 하나만의 특수한 경험이 아니라 지구를 향해 함께 여행가고 있다.


수백 개의 영어단어를 외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감동적인 말 한마디가 더 중요하다.


시는 나와 세상에 대한 물음과, 삶의 무게가 압축되어 있어, 시는 인문학의 완성이다.


연탄 한장 - 안도현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또 다른 말도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이 되는 것
- 하찮은 연탄재도 사람을 따뜻하게 하는데, 우리 인간은 자기만 따뜻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이기적이 아닌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가지 않은 길
세상이 정해준 답과 다른 인생을 살고 싶다면, 시인의 말을 경청하라-
이 말이 내 가슴을 설레이면 그 길을 가라!
내 인생의 새로운 자유를 느낄 수 있다.


사실 우리는 인생에서 너무 많은 길을 만난다. 이 길은 선택의 길이다.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가? 는 참으로 어려우면서도 신중한 문제이다. 인생에서 길의 선택은, 시인의 말처럼 내 가슴을 설레이는 길을 선택한다면 새로운 자유를 느낄 수 있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 고은


우리는 지금 올라만 가고 싶어 한다. 내려가는 연습도 해야 한다. 그래야 보지 못했던 삶도 불 수 있고 자신을 찾을 수 있다.
간결한 두 문장으로, 그 속에 나와 세계에 대한 깨달음이 녹아있다.


수선화 - 정호승


우리는 배고플 때, 밥을 먹지 밥그릇을 먹는 게 아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밥그릇을 먹고 있다.
시는 밥이지 밥그릇이 아니다.
결국은 인간이라는 밥, 고통이라는 밥,


시나 인문학의 본질이 밥그릇이 아니라 밥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겉모양인 밥그릇을 중시한다. 겉모양보다는 알맹이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수선화 - 정호승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가끔은 하나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내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번 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외로워도 외로워하지 말고,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나의 길을 걷다 보면, 세상이 나의 이름을 아름다운 꽃으로 불러 주는 날이 올 것이다.-논어의 학이시습...
결국 인문학이란. 인간이란, 행복이란
플라톤이 가장 중시한 것은 참됨, 선함,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짧은 시 한 줄에서도 감동을 받고 참된 사람, 선한 사람,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있다. 이것이 인문학이다.
오늘 조금이라도 참됨과 선함과 아름다움을 생각하고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이 인문학이고 행복이다.



[2]


사회적으로 유명하거나 성공한 사람들에게 後輩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무엇인가 하고 물어 보면, 그 분들은 책을 많이 읽으라고 한다. 책 중에서도 古典을 많이 읽으라고 한다. 왜 그분들은 尖端技術이나 외국어보다 고전을 많이 읽으라고 하는가 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고전 하면 부정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입시라는 제도 때문에 감동보다는 문법, 그리고 외우는 교육을 했기 때문이다. 고전이란 무엇인가? 그리스 로마 문화에서 가장 중요시 하였다.
現代의 모든 나라들은 物質主義와 利己主義로 病들어 가고 있다. 이것을 解決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고전이다. 고전 속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가난 속에서도 여유,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 고전을 읽으면 어려운 현실에서 즐겁게 살아갈 수 있다.


고전하면 <龍飛御天歌>의 유명한 句節이 생각난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뮐새, 꽃 좋고 여름하나니
샘이 깊은 물은 가믐에 아니 마를새, 내이러 바다로 가나니...”


이 말은 모든 나무가 다 열매를 맺는 것도 아니고, 모든 샘물이 다 바다로 가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옛날 작품이라고 해서 모두 고전으로 남는 것은 아니다. 바람과 가뭄을 견디어 낼만한 깊은 뜻을 지닌 문학 작품만이 열매를 맺고, 後代의 바다로 나갈 수 있다.


오늘날 여러분들은 고전하면 문학성도 없고, 재미도 없고 그리고 현실과 遊離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니다. 西洋初期소설-千篇一律的이다.
그것은 우리의 고전을 읽지 않은 無知한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현대문학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현대문학이 고전문학보다 文學性과 藝術性이 뛰어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도 무지의 表現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현대소설 중에서 아무리 훌륭한 소설이라도 많이 읽혀야 3-4년 길어야 10년 정도 읽히고는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우리의 고전 중에 춘향전 같은 작품은 수 백 년 동안 읽혀왔고 그리고 우리 民族이 存在하는 한 永遠히 읽힐 것이다.
사실 우리의 고전은 너무나 有名하여 損害를 본다. 너무나 유명하기에 읽지 않고도 읽은 것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 나라 최고의 고전을 그 나라 사람이 읽지 않았다면 그것은 羞恥이다.
예)춘향전)


단군신화


서양에 이런 말이 있다. ‘한나라의 민족성을 알려면 그 나라의 여성을 보라’는 말이 있다. 예(가정의 주부의 모습을 보면, 그 집안의 수준을 알 수 있다. 문화적, 경제적 삶)-언어사용.
서양의 문화를 보면, 두 가지 문화가 있다.-헬레니즘과 헤브라니즘이 말은 영국의 비평가 메쉬 아놀드가 <문화와 무질서>라는 책에서 서양문화를 근본적인 두 전통을 대칭적으로 비교한 이래 문학비평, 문화비평의 중요한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헤브라이즘-구약성서에 나타난 유태인의 인생관을 근간으로 하여 발전된 기독교의 사상을 말하는 것으로, 우주의 절대적인 존재자를 도덕적인 존재로 보고 각개인은 그 절대자의 뜻에 합당한 도덕적인 인물이 되도록 노력해야 된다는 양심적이고 도덕적인 세계헬레니즘 - 이성적인 세계를 중시하는 사상-그리이스 사상 희랍문화 하면 , 우리가 먼저 생각하는 것은 미의 여신을 생각하게 된다. 아포로디테, 헬렌.
그 영향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것이 -미스유니버스의 선발기준-- 여신들의 조각상에서 유래된 것이다.-예 미장원, 의상실- 외모
성의 상품화는 절대로 안 된다. 그러나 가슴을 내밀고.-안티 미스코리아가 생겨서 공중방송에서 중계하지않는다. 안티미스코리아.
정신보다는 겉으로 드러난 육체미와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헬레니즘사상이다.
기독교 문화에서 여성을 보면, 동정녀 마리아를 연상하게 된다. 마리아는 아포로디테와는 달리 성스럽고, 정신적인 순결성을 느끼게 한다. 이것이 육체보다는 영혼을 추구하는 헤브라이즘사상이다.


아놀드의 말에 의하면,
인간이 헤브라이즘의 도덕적인 세계만을 강조하면 인간 속박의 그물이 될 수 있고, 헬레니즘의 理智的이고, 육체적인 쾌락만을 추구하게 되면 良心이 마비된 무질서 한 방종을 낳게 된다.
이 두 사상의 결합은 쉽지 않지만 바람직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두 사상을 調和롭게 겸비해야 한다.
그러나 신은 인간에게 대단히 평등하게 만들었다.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아름답게 보여야 책임과 의무가 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있다면 부족한 문화를 채워나가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인생에서 실패할 수 도 있다. - 담배 침, 잔디, 이혼사유 - 겉이 아름다워서 결혼을 했는데 속이 텅텅 비어서서 같이 살아갈 수 없어서 이혼을 할 수도 있다. 하루에 2-3분 동안 시 한편만 읽는다면 몸도 마음도 아름다울 수 있다.


그러면 우리의 민족성을 여인을 통하여 본다면--단군신화의 웅녀.
우리는 우리의 조상을 단군 할아버지라고 한다. 단군 할아버지는 아득한 신화의 한 주인공이지만 아주 가깝고 정답게 느껴진다. 때로는 우리 이웃에 살고 있는 이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단군이 실존 인물이냐, 아니냐 하는 사실보다는 모든 것이 과학화되고, 변화한 오늘날도 이 신화가 왜 이렇게 가깝게 느껴지는가 하는 문제를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신화를 통하여 한국인이 어떤 마음과 어떤 상상력을 가지고 살아왔는가 하는 의식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신화는 겉보기에는 황당무개한 이야기 같지만 수천 년 동안 계속 전해 왔다는 것은 분명히 그럴만한 가치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창조신화의 원형이 있기 때문이다.-서사시의 원형은 단군신화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하늘의 부와 땅의 모가 결합하여 만물을 낳는 다는 것이 창조신하의 원형인 이다. 만약, 씨앗이 땅에 떨어졌을 때 하늘에서 햇빛과 비를 내리지 않는 다면 식물은 싹을 트지도, 자랄 수도 없다. 그래서 인디언들은 하늘에서 비가 오는 것을 하늘과 땅의 성적인 결합이라고 한다. (그래서 인간은 비가 오면, 외롭다 왜-- 하늘과 땅이 --음악, 친구, 술-영화를 보면 비만 오면 문제가 생긴다. -사랑고백.)
인디언들은 땅을 어머니의 자궁으로도 보고, 희랍 신화에서도 보면 우라노스라는 하늘의 아버지와 게아라는 땅의 어머니가 결합하여 만물을 낳는다고 본다.
구약 창세기에도 하늘의 신이 흙 속에 입김을 불어넣어 인간을 만든다. 그래서 인간은 하늘과 땅을 부모처럼 생각했다. 그러니까 천지를 즉, 자연을 오염시키는 행위는 불효가 된다.


단군신화의 경우에도
환인의 서자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와 땅의 웅녀와 결합하여 인간을 낳는다는 이야기로 이 이야기 속에는 하늘과 땅이 결합하는 창조 신화의 원형이 잘 나타나 있다.
이러한 원형적인 요소가 인간의 무의식 속에서 전해 왔다.
환인은 초자연적인 하느님이기는 한데 환인의 서자라고 하는 환웅은 지상의 역사적인 시간 속으로 내려왔다. 환웅의 웅녀와의 결혼은 천신족과 지신족과의 결합이다. (해모수 유화)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 왔다는 말은 다른 곳에서 이주했다는 뜻과 이주민의 자부심을 표현한 것이다. 태백산이라는 신단수라는 나무는 곧 하늘과 땅을 연결해 주는 구실을 하였다. 산신이나 농신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인간은 신과 동물이 다 부러워하는 존재이지만, 인간은 신과 동물의 중간적인 존재로 항상 비참하게 살아간다. 왜(아름다운 여인을 보면 보호본능은 신적인 요소, 반면에 동물적인 속성은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 그러므로 인간은 신적인 요소와 동물적인 요소 때문에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간다. )
이 단군신화는 역사나 철학에서는 제외 될 수 있지만 문학에서는 도외시 할 수 없다. 우리의 민족 설화나 고전소설을 보면 단군신화의 요소가 잘 나타나 있다.
단군신화에는 나무가 나온다.-(신단수 아래)
이것은 유한한 땅에 살면서도 무한한 하늘을 그리워하는 마음이다. 사람들은 그 인간의 마음을 나무에서 본 것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하늘을 향해 성장해 가는 나무는 하늘과 땅을 연결시켜 주는 것으로 우리의 신화에 나무가 등장하고, 성황당이나 무속에서 나무를 매개로 하는 것도 여기에서 그 의미를 찾아 볼 수 있다.


단군신화에는 두 인물이 등장한다.
호랑이--호랑이는 인내심이 없고, 사납고 힘이 센 인물은 악역으로 묘사되어 있다.(변사도, 놀부) 하지만 우리 역사나 문학에서 민중들의 사랑을 받는 주인공(춘향 사씨 흥보)은 모두 곰같은 존재로 참고 견디어서 끝내는 행복하게 된다. 중용의도-奸臣, 기회주의자, 흑백논리를 중시.
이처럼 단군신화는 우리 문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우리 민족이 좋아하는 수는 3이다. 왜일까. 천부인 3개, 3.7일, 삼천의 무리, 단군신화를 보면-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올 때, 풍백, 운사, 우사와 삼천의 무리를 거느리고 이 땅에 내려왔다. 환인-환웅-단군, 삼칠일,-우리의 생활에서 찾아보면-삼삼칠박자, 삼총사, 삼세번, 삼삼, 노크, 노래-돌아가는 삼각지, 33인, 초가삼
간, 술도 삼배, 삼신할머니, 3.6.9놀이, 삼행시, 세 살 버릇 여든, 작심삼일, 이름- 삼돌이, 삼순이, 고기-삼겹살, 삼자대면. 김영삼, 사람 이름, 지명)


언어는 그 사람의 인격을 담는 그릇이다. 학생들의 언어-단군신화의 영향을 찾아 볼 수 있다. 조상을 동물로 생각해서인지 몰라도 욕도 동물성으로 한다. 식물적으로 욕을 하면 참 아름다울 수 있다. -진달래 같은 년, 소나무 같은 놈, -개,돼지
욕도 잘해야 한다. 빌어먹을-흥해라
미국-굿모닝-아이구 죽겠다.


곰은 두 가지를 기원한다. --인간, 애를 낳게 해달라고--
웅녀가 애를 날게 해 달라는 대목은 주목할 만하다. 여자가 남자에게 노골적으로 誘惑한다.
남자가 여자에게 구애하는 것이 옛날 風俗圖이자만 웅녀만은 아니다. 사랑을 노골적으로 그리고 적극성을 보인 맹렬 여성이다. 이것은 모권사회의 영향으로 보인다. 자궁문화권
우리나라만큼 가부장제를 중시하는 나라도 드물다. 하지만 집안에 깊숙이 들어가 보면 여자의 힘이 더 세다. 이것은 단군신화의 영향--그러니까 조선조의 점잔은 양반들이 여자들이 투기를 하고 난리를 치니까 칠거지악(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 무자, 질투, 말썽 많은 여자, 음행, 나쁜 병, 도둑질)-
三不去(시부모의 삼년상, 갈 곳이 없는 여자. 조강지처)
그러나 일본은 다르다.
일본의‘아사나미노미꼬또’라는 신화를 보면 일본인의 민족의식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신화도 보면 여신이 먼저 남신을 보고, 당신 참 아름답군요 하면서 接近을 한다. 그러나 아이가 잉태하지 못하자 남신이 불평을 한다. “여자가 나서니까 되는 일이 없다”고 하면서 이번에는 내가 먼저 하겠다고해서 만든 것이 일본의 국토이다.
이것은 작은 신화이자만 이 신화 속에는 일본인의 의식이 잘 나타나 있다.(오늘날 일본이 세계최고의 부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 신화의 영향이라고 생각 한다. 일본의 여성들은 남편을 위해 헌신하니까, 남편이 가정을 위하여 열심히 노력한 것이 오늘날의 일본을 만든 것이다. 가정의 질서와 평화 그것이 오늘의 일본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여러분의 가정은 어떤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일본의 가정이 무너지고 있다. 한류 때문에-그러니까 일본의 우파들이 반한 시위를 합니다. 심각하다. 조선놈은 바퀴벌레다. 모두 죽여야 한다.)===일본은 없다-추한 한극인, 法院, 작가의식이 없다. 매맞는 아내.


단군신화를 보면,
마늘과 쑥을 먹고 어두운 동굴에서 지낸다(왜 마늘과 쑥일까.=소설 속에 쑥대밭)-떡, 엿, 꿀
마늘과 쑥을 먹으라고 한 것은 보면 이것은 일종의 정력강장제이다.
古文獻에 의하면 마늘-여성 생리에 특효약, 쑥은 女性更生의 비약으로 성적인 욕구를 느끼게 한다. 세계에서 우리 민족만큼 정력 强壯劑를 좋아하는 민족도 드물다. 요즈음 흔히 볼 수 있는 정력제의 선전은 단군신화에서부터이다. (단군신화의 영향)
그러면 단군신화의 영향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마늘과 쑥은 달콤한 음식이 아니라, 쓴 음식이지만, 참고 먹으면 도리어 인간에게 새 활력을 주듯이 고난의 의미를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인간은 그냥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인내와 역경을 통해서 완성되어 간다는 귀중한 삶의 智慧를 암시하고 있다.
한국문화의 특성은 무엇인가. 동굴의 문화라고 해석하고 싶다,
어둠의 동굴을 피하지 않고 그곳을 스스로 받아들일 때 곰은 새 생명을 얻게 된다. 우리 민족은 진정한 삶과 희망을 고난의 어둠 속에서 구하려고 한다. 단군신화의 동굴의 의미는 후대 소설을 통하여 그 의미를 보면, 춘향전의 춘향이도 옥에 갇히어 그 시련을 이겼을 때 이 도령의 참된 配匹이 된다. 심청이는 인당수에 몸을 던졌을 때 재생하여 왕후가 된다. 흥부는 놀부의 집에서 떠나 자기 움막에서 고난을 겪고 비로소 부자가 된다. 춘향전의 옥, 심청전의 인당수, 흥부전의 움막집, 이 모두가 단군신화의 어두운 동굴의 형태가 변한 모습이다.


호두의 맛은 딱딱한 껍질을 깨뜨릴 수 있는 能力이 있을 때만 그 맛을 볼 수 있다고 한다. 古典은 精讀했을 때만이 참된 고전이 되기 때문에 되풀이해서 읽을 때 의미가 새로워진다. 고전을 통해서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과 새로운 生命力을 얻을 수 있다. 고전 작품은 죽어버린 古代生物의 化石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살아서 움직이는 巨大한 힘이다. 그러므로 고전을 읽어야 한다. 이처럼 우리의 고전문학은 時間과 空間을 超越하여 永遠히 存在할 價値있는 作品이다.
고전문학을 통하여 우리 先祖들이 어려운 현실 속에서 어떻게 살아왔는가. 그리고 슬픔과 분노와 사랑을 어떻게 표현해 왔는가. 그것을 통하여 우리가 현실을 살아가는 방법과 새로운 生命力을 얻을 수 있다.
이처럼 우리의 고전 문학은 우리 선조들의 純粹하고 素朴하고 餘裕있는 感情의 表現이다.
이 세상에서 힘이 가장 센 사람은 누구인가?
책을 가장 많이 읽은 사람이다. 책 속에는 여러분이 구하고자하는 것이 들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구하고자 하는 것이 名譽라면, 또 여러분이 구하고자 하는 것이 眞理라면, 또 여러분이 구하고자하는 것이 戀人이라면, 책 속에 그 모든 것이 들어 있다.
여러분이 진정 인생이 무엇이고, 哲學이 무엇이고, 나는 누구인가. 또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觀心이 있다면 책을 읽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책 속에는 그 모든 것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교보문고-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古文眞寶에 보면,
父母敎而不學이면 子不愛其身也요
雖學而不勤이면 是亦不愛其身也요


그러므로 勤勉하게 공부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다.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여러분을 사랑해 주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여러분을 사랑할 수 없고, 어느 것도 이룰 수 없다는 平凡한 眞理를 알아야만 한다.
變化의 時期에 많은 사람들이 野望과 希望을 갖기도 하고 挫折하기도 한다. (우리 民族의 人生觀을 보면 塞翁之馬(변방의 점술가, 말-오랑캐-몇 개월-1년후-회남자)적인 哲學을 찾아볼 수 있다. 餘裕, 이처럼 우리 민족은 極端的인 不幸속에서도 希望을 버리지 않았고 最高의 幸福한 瞬間에도 그 행복이 永遠하다고 믿지 않았다. 流配, 하지만 인생은 자신의 것이다. 여러분 스스로 運命을 開拓해 나가야 한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운명이란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다. 영원히 살 것처럼 꿈꾸고, 오늘 죽을 것처럼 행동하라. 그러면 운명의 여신이 반드시 응답할 것이다’


어떻게 이 不滿과 葛藤을 解決할 수 있는가?
이처럼 자신의 위치에 대해 不滿을 갖고 葛藤한다.
이 葛藤에서 깨달음(불교최고의 덕목-깨달음을 위해 스님들은 머리를 깎고 세상과 인연을 끊고 수련)을 얻으면 보다 낳은 未來를 가질 수 있다. 하지만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人生을 葛藤과 彷徨으로 살아가야만 한다. 우리는 지금 이 空間에서 最高는 아니지만 最高가 되도록 열심히 勞力해야만 한다. 여러분이 이 대학에 들어올 때는 다른 친구들보다 조금 부족했지만 卒業후 여러분들은 그들보다 더 낳은 位置에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여러분을 사랑하는 것이고 自身을 찾는 것이다. 이것이 自尊心이다.)
내가 좋아하는 말이 있다. 一切唯心.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그러면 우리는 문학을 어떻게 만나고, 이해할 것인가? 하나의 작품이 있다면,
작가와 문학작품내용을 이루는 외적인 條件, 작가의 사상, 사회배경, 시대적 배경, 작가의 사상과 체험, 종교, 자연 등이 중요하지만 문학이 되기 위해서는 언어적 구조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런 연구방법론을 1)사회학적인 방법론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그 인간이 표현한 문학은 현실을 度外視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구체적인 시대와 사회 속에 살아가는 인간을 그리는 것이다.
2) 하지만 근래에 와서 작품외적인 요인보다는 작품 그 자체를 연구하고 分析하는 방법론이 있다. 신비평(new critisim)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문학외적인 조건은 하나의 보조적인 것이다. 본격적인 문학은 내적 조건에 있다.
뉴크리티즘과 유사한 文藝思潮는 1915-1930의 러시아의 形式主義者와 프랑스의 構造主義者들이다. 이처럼 近來에 와서 작가의 사상이나 사회상의 반영보다는 작품 그 자체의 언어적인 묘사내용을 중시한다. 그러니까 문학을 언어예술이라고 한다.


半月黃眞伊
誰斷崑山玉裁成織女梳
牽牛離別後愁擲碧空虛


이 시에서 어떤 사상보다는 순수한 언어의 리듬과 比喩를 통해서 우리에게 아름다운 마음을 갖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학을 언어예술이라고 한다.
정말 오늘날 같이 凶惡犯이나 많은 犯罪者들이 이 아름다운 시 한편을 읽거나, 베에토벤의 아름다운 음악 한 곡을 들었다면 나쁜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문학을 어떻게 만날 것인가.
大學
心不在焉이면 視而不見하고
聽而不聞하며 食而不知其味니라


아무리 아름다운 문학이라도 자기 자신의 마음이 아름답지 않으면 결코 아름다운 것을 수용할 수 없다.(여유-아름다움) 그래서 우리는 자기 스스로 아름다운 문학을 받아들일 수 있는 순수한 마음을 가져야만 한다. 생활도 아름답게 해야만 한다. 눈, 귀, 입, 손
문학은 언어예술이다. 왜냐하면 문학의 매체가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문학은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는 것이다.

keats는“미는 진이고, 진은 미이다.”칸트는“진과 미는 둘이 아닌 하나이다.”


모든 예술과 마찬가지로 문학도 인간의 의식과 생활감정의 미적인 표현이다.
美는 모든 예술에서 추구하는 최고의 것이다. 어쩌면 예술에서뿐만 아니라 인간이면 모두가 아름답기를
원한다.
그러면 정말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美는 진실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학은 이제 아름답고 眞實한 것을 바탕으로 해야만 한다.
진실은 감동적이고, 아름답고, 순수하기 때문이다.
진실이 없다면 어떤 아름다움이나 예술이 존재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생활과 만남에서 진실이 없다면 그것은 이미 의미가 없다.


웰렉과 워런은 <문학이론>에서
“藝術은 本質的으로 아름답고, 속성적으로 眞實한 것이다.”
그러면 그 진실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자연이나 인간들의 삶 속에서 찾을 수 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예술은 自然의 模倣”, 루소는“자연으로 돌아가라”
특히 동양사회에서 자연이야말로 인간의 窮極的인 歸依處이고, 老莊思想에서도 자연사상은 곧 문학인들에게 널리 퍼져 자연이 素材가 되고 主題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효석을 예로 든다면, <메밀꽃 필무렵> 산, 돌 ,물 등 자연과의 接觸이 심하게 나타난다. (김소월, 진달래꽃, 김동명, 신석정 등의 전원시인이나 박목월, 박두진, 조지훈 자연파시인)


도시문명에 시달린 인간들은 안식과 평안을 구하기 위하여 찾아가는 자연은, 곧 영혼의 고향일 수 있다.
자연은 인간이 돌아갈, 偉大한 어머니이다.
인간이 자연을 찾고 작품을 쓰는 것은 아름다움만을 찾아서 하는 것은 아니다. 자연에 통해서 인간이 많은 것을 배우기 때문이다.
자연은 문학의 내용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로 社會環境과 더불어 계속문학은 形象化해 나갈 것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자연에 沒入하여 사회를 度外視한 문학이나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정말 인간은 자연의 위대함 앞에서 머리 숙이고 순종해야 한다. 더 이상 인간이 오만하다면 우리 인간의 생명을 위협받게 된다.
자연을 노래한 아름다운 문학작품을 보면
성혼
말없는 청산이오 태없는 유수로다.
값없는 청풍이오 임자없는 명월이오
이중에 병없는 이몸이 분별없이 늙으리라
자연을 예찬한 노래라고 단순하게 해석해 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한 걸음 더나가 보면 나와 대자연이 하나 되어 조그마한 자아를 무한대한 대자연의 경지까지 확대시켜나간 그 웅장한 기상에는 누구도 감탄만 할사람이 없다.
인간적인 물욕을 버리고 대자연에 순응함으로써 청산과 유수와 청풍과 명월--- 모든 것을 내 것으로 만들어 버린 그 멋진 풍유. 돈과 명예와 비교되지 않는다.
장주가 꿈에 -나비되어 훨--
사소한 욕심에 달관하여 무궁한 대자연과 동화되어 분별없이 살아간다면 비록 하루를 살다가 죽는다 해도 거기에서 영생을 느끼게 된다.
내 마음속에 나의 우주를 가지고 살아가는 멋- 이것이 풍유이다.
욕심은 번뇌를 낳고 번뇌는 마음을 어지럽게 속박한다. 떠나는 임이 굳이 붙잡고 늘어져서 보내주지 않으려고 앙탈을 부리면 눈물이 나오고 한숨이 솟아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生者必滅이고 會者定離라는 자연의 섭리를 깨닫고 나면 이별이 슬픈 이고 고통이지만 거기에도 아름다운 시정을 느낄 수가 있다.
죽음의 문제 - 종교(모든 人공평하게 주어졌다. - 시간, 죽음) 아름답고 열심히 산 사람은 죽음도 아름답다.
가장 철학적인 말- 돌아가신다.


문학은 작가의 직접체험과 간접체험을 서술한 자서전적인 작품이 많다. 그 대표적인 것이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우리 조상들은 가난했지만 마음의 여유를 갖고 살았다. 하지만 오늘날 사회는 경제적인 여유는 있지만 마음의 여유가 없다. 그러면 여유 있는 사회와 그렇지 않은 사회의 差異는 무엇인가?
김삿갓-배, 절병 부인
어져 내일이야 그럴 줄 모르던가
있으라 하면 가랴마는 제구태어
보내고 그리는 정을 나도 몰라 하노라
떠나는 님의 옷소매를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며 앙탈을 부리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할뿐 거기에는 멋이 풍겨나지 않는다. 그러나 붙잡을 수 있는 님을 고이 보내주면서 애타게 그리는 정을 노래로 불러 장부의 간담을 녹여내는 데 멋이 있고 풍류가 있는 것이다. 풍류란
無味乾燥한 일상생활을 藝術의 境地까지 昇華시켜서 생활을 다채롭게 만드는 생활예술이다. 그 옛날 우리네의 선비들은 풍류를 무척 숭상하였다. 風流를 즐겼다는 것은 생활을 미화 할 만큼 정신적인 여유가 豊富했다는 말이다.
물질적인 享樂보다 정신적인 快樂을 소중히 여겼던 취향이 현대인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나비야 청산가자 범나비 너도가자
가다가 저물거든 꽃에서 자고가자
꽃에서 푸대접하거든 잎에서 자고가자
아무 것에도 구애됨 없이 解脫의 경지에서 淸風流水와 같이 自由自在하게 살아가는 그 趣向이것이 풍유의 멋이다



[3]


문학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어떻게 보면 너무나 漠然하고 廣大한 것이다. 지금까지 문학에 대한 수많은 정의가 내려졌다. 아리스토--시학에서부터 싸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이르기까지 수 없이 많이 정의되어 왔으나 객관적이고 普遍的인 정의는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누구나 문학에 대한 정의는 내릴 수 있지만 동시에 그 누구도 문학이라는 실체를 總體的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나 나름대로의 문학관을 가질 수 있다.


문학이란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넓은 의미의 문학- 문자로 기록한 모든 것-역사, 哲學
좁은 의미의 문학-언어문자를 매개로 하여 인생을 探究하고 표현하는 창조예술
웰렉과 웨런은「문학이론」에서 세 가지로 정의

1) 문학은 인쇄된 모든 것
2) 위대한 책 -주제가 무엇이든 문학형식과 표현으로 유명한 책
3) 문학이라는 예술
아놀드(Arnold)
문학은 거대한 말이다. 그것은 문자로 기록되거나 책으로 인쇄된 모든 것을 의미한다.
브룩(Stopford Brooke)
문학이란 말은 독자에게 쾌락을 줄 수 있는 방법으로 배열된 지성적인 인간의 사상과 감정의 기록
헉슬리(Thmos Huxley)
문학은 淨化된 쾌락 중에서 가장 뛰어나 것이다.
(채털이 부인의 사랑, 변강쇠전)
이상을 종합해보면,
문학이란 언어와 문자형식을 통하여 인생을 탐구하고 그리고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創造하는 세계


그러면 이러한 문학을 왜 읽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많은 문학작품을 많이 읽어 왔다. 그러면서도 왜 문학작품을 읽느냐고 묻는다면 쉽게 대답할 수 없다.
하나는 문학은 상상의 세계를 추구한다. 상상의 세계는 인간에게 풍요로운 삶을 제공한다.
또한 문학을 통하여 인생의 체험을 얻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문학작품 속에서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자신의 삶의 모습이나 인간심리를 경험할 수 있고, 작품 속의 등장인물이 되어 자신의 삶을 돌아다 볼 수 있는 기회를 기질 수 있다.
흥미로 책을 읽든 , 어떤 목적의식을 가지고 책을 읽든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이러한 즐거움은 생활을 보다 餘裕롭게 해주며 삶의 재미를 느끼게 해준다.
아무리 사회가 복잡하고 인간성의 상실을 안타까워하여도 그래도 문학작품을 읽을 수 있다는 여유는 즐거움을 맛 볼 수 있다.


문학의 기능
문학은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情緖와 感動을 주는 것이다. 문학작품은 하나의 생명이며 독자적인 가치를 갖는다. 문학의 恒久性이란 시간적으로 영원하고 생명력이 있는 것이 특징이고, 普遍的이다. 문학 작품은 시대를 超越하여 읽혀지는 항구적인 생명이다. 예를 들면‘사랑’이란 고대와 현대가 다를 수 없고 미국과 한국이 다를 수 없다. 감정이나 정서가 인간에게 있어서 그리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변화하는 것은 정서가 아니라 사상이며 정서자체가 아니라 정서표현의 방법이다.
문학 작품은 어떤 목적으로 쓰여 졌고, 작가들은 왜 창작활동을 하고, 독자는 왜 작품을 읽는가하는 문학의 기능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학자들은 다양한 주장을 해왔다.
크게, 문학이 敎訓設과 문학의 快樂說로 양분된다.
즉, 문학이란 독자를 가르치고·교화시킨다는 교훈설과·문학이 독자에게 즐거움을 주어 기쁘게 한다는 쾌락적인 주장이다.(황진이. 경포전설 - 홍장, 박신, 이시환, 조운홀, 호질, 변강쇠전)
전자는-문학을 인식구조로 보려는 관점이고
후자는 美的構造로 보려는 觀點이다,.


참다운 문학적 기능
언어를 통해서 표현하는 미가 곧 문학이다. 그러므로 문학의 일차적인 목표는 미의 표현에 있다. 혹자들은 한국문학에서는 미의식보다는 윤리. 도덕성이 더 강하게 나타난 다고 한다. 그리고 한국문학에서 윤리성을 떠나서는 미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어떤 것을 아름답게 보았으며, 또 어떤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있는가는 문학을 통해서 알아볼 수 있는 직접 목표이다. 그런데 우리의 문학은 미의식과 윤리의식이 바뀌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아니다. 그것은 잘못된 문학관이거나 우리의 고전문학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사람들의 의견이다.
문학의 교훈적인 기능이 단순한 도덕적, 종교적 교훈이나 정치적 이데올로기만을 강조하는 것이라면, 받아들일 수 없지만 문학의 교양적 가치로서의 교훈성을 뜻한다면, 그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현대는 정신적인 기조가 흔들리는 방황의 시대이기 때문에, 문학이 인생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주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예시한다면, 문학의 교훈적인 기능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덧붙일 것은 문학이 독자를 가르친다고 해서 과학에서처럼 단순한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즉, 문학은 독자에게 즐거움을 주고, 감동을 주는 가운데 간접적인 인생의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다. 괴테는‘위대한 작품은 우리를 가르치지 않고, 우리를 변화시킬 뿐이다. 문학은 지식으로 가르치는 기능이 아니고, 감동시키는 힘의 문학이다.


문학의 쾌락적인 기능을 보면,
쾌락적인 기능이 단순히 俗世的인 흥미나 관능적인 쾌락과 대중적인 쾌락만을 뜻한다면, 정당한 문학의 기능이나, 목적으로 인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문학의 쾌락성이 인간의 美的情緖를 감동시키는 정신적인 즐거움을 뜻한다면, 바람직한 문학의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아리스---가 말한 카타르시스나 칸트가 말한‘무관심의 기쁨’이야말로 여기에서 말하는 정신적인 즐거움이라고 하겠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문학의 참다운 기능이란, 독자에게 즐거움을 주는 동시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가르쳐주는 것이 올바른 문학의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의 특징은 허구성이다. 즉 거짓말로 꾸며진 가공의 세계이지만 진실한 삶의 모습이 함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