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오색령

<부록Ⅰ-2> 조선시대 양양부(襄陽府) 소동라령(所冬羅嶺)의 고찰(考察)

페이지 정보

조회 1,512회 작성일 2017-03-17 14:46

본문

조선시대 양양부(襄陽府) 소동라령(所冬羅嶺)의 고찰(考察)



Ⅰ. 問題의 提起

소동라령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양양도호부편에 “要害, 自本府西去麟蹄境所等羅嶺三十六里”라는 기록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양양도호부편에는 “소동라령은 부 서쪽 60리에 있으며 겹치고 포개진 산맥에 지세가 험하고 궁벽지다. 예전에는 서울로 통하는 길이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라는 기록이 있는 등 소동라령에 대한 역사기록들이 많이 남아 있음에도 소동라령(所冬羅嶺)이 현재의 한계령이었다는 기록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역사기록에 보면 분명히 오색령, 소동라령, 옛 한계령은 모두 다른 영이었다.
그럼에도〈사진 1〉에서 보듯이 한계령(오색령) 정상에는 언제 누가 세웠는지 알 수 없는 낡은 간판에 “문헌상 가장 최초로 등장하는 한계령에 관한 지명은 세종실록지리지(1454년)의 ‘소등라령(所等羅嶺)’이다.---”라고 기록해 놓고 있다.

01.jpg

뿐만 아니라 국가기관인 국토해양부 국토지리정보원에서 2008년도에 발간한 『한국 지명 유래집』에도 한계령이 “옛날에는 소동라령이라고 불리었다”1)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모두 소동라령이 지금의 한계령이라는 출처는 밝히지 못하고 있다. 다만 “설악산은 중추가 되면 눈이 내리기 시작하여 여름에 이르러 녹으므로 설악, 설산, 설화산으로 불리었고 소동라령도 같은 뜻으로 지어진 이름으로 자연스럽게 한계령으로 바뀌었다”2)는 막연한 주장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인터넷에서 ‘소동라령’을 검색하면 현재의 한계령이 옛 소동라령인 양, 왜곡되어 급속하게 퍼져나가고 있다.
이에 지금까지 잘못 알려진 소동라령의 위치를 고지도, 문헌기록, 경계기록, 하천기록, 거리기록 등을 통해 찾아보고 이를 토대로 현지를 실사도 해 봄으로서 잘못 알려진 소동라령과 한계령의 위치에 대한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아 우리의 향토문화로 재정립하고자 한다.



Ⅱ. 소동라령(所冬羅嶺)의 위치


1. 고지도(古地圖)를 통해서 본 소동라령

소동라령과 오색령, 옛 한계령은 명백하게 다른 영(嶺)이었다. 이는 먼저 〈표 1〉과 〈지도 1〉고지도(古地圖)들에 표기된 고개명칭을 보면 오색령, 소동라령, 한계령을 다른 위치의 영으로 함께 표시하고 있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02.jpg


03.jpg

이 영들은 영동에서 영서로 통하는 백두대간을 넘는 영들이기 때문에 지도상에도 북에서부터 남으로 순차적으로 표시될 수밖에 없다. 특히 지도는 한눈에 볼 수 있어 글로 기록된 문헌에 비해 영의 좌우관계를 그르칠 우려가 적다는 것이다. 그런데 위의 도표에서 보듯이 모든 고지도에서 소동라령은 오색령 남쪽 위치에 표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연수파(박달령)와 구룡령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표기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소동라령은 오색령과 멀리 떨어진 구룡령에 더 가까운 영으로 지금의 한계령이 아님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2. 문헌기록을 통해서 본 소동라령

『여지도서(輿地圖書, 1765년)』의 양양 관애(關阨)편에는 오색령⋅필여령⋅소동라령⋅조침령⋅구룡령⋅형제현⋅양한치 등의 일곱 항목이 순차적으로 나열되어 있다. 여기에 보면 “오색령은 설악 남쪽가지에 접하고 인제와 경계를 이룬다. 필여령은 오색령 남쪽가지에 접하고 있으며 춘천 기린계이다. 소동라령은 필여령 남쪽가지에 접해 있고 기린계로 서울로 통하는 길이었으나 지금은 폐지되었다. 조침령은 소동라령 남쪽가지에 접하고 기린계이다. 구룡령은 조침령 남쪽가지에 접하고 있으며 강릉 금천면과 경계를 이룬다”3)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관동읍지(1871)』양양 관애(關阨)편에도 “오색령은 설악산 남쪽가지에 접해있고 인제와 경계이고, 필여령은 오색령 남쪽가지에 접해있고 춘천기린과 경계하며, 소동라령은 필여령 남쪽가지에 접해있고 기린과 경계하며 과거 서울로 가는 길이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조침령은 소동라령 남쪽가지에 접해있고 기린과 경계한다. 구룡령은 조침령 남쪽가지에 접해있으며 강릉 금천면과 경계한다.”4)고 적고 있다. 강원도『양양군읍지 2(江原道 襄陽郡邑誌 二)』에도 “소동라령은 부 서쪽 60리에 있다. 즉 필여령 남쪽 가지로 기린과 경계를 이루며, 옛날 서울로 통하던 길이였으나 지금은 폐쇄되었다”5)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종합하면 소동라령은 필여령과 조침령 사이에 있었던 영임을 확인할 수 있는데 반하여, 필여령 북쪽에 위치한 현재의 한계령은 소동라령과 같은 영이 아님을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다.


3. 경계기록을 통해서 본 소동라령

위 문헌뿐만 아니라『대동지지(大東地志)』1866년 양양 영로조(襄陽嶺路條)에는 연수파령⋅오색령⋅필여령⋅박달령⋅소동라령⋅구룡령⋅양한치⋅소량치 등의 모두 여덟 개의 항목이 열거되어 있다. 여기에서 소동라령(所冬羅嶺)에 대해 “오색령, 필노령, 박달령 모두 서쪽 50리 인제계이고, 소동라령은 부 서쪽 60리로 아주험한 서울로 통하는 대로였다. 기린계이다”6)라고 적고 있다. 또한,『만기요람(萬機要覽)』군정편4(軍政編四) 관방(關防) 강원도편에는 “양양영로(襄陽嶺路)는 오색령⋅필여령, 기린(猉麟)통로는 소동라령⋅조침령, 구룡령은 강릉과의 경계, 형제현(兄弟峴)⋅양한치(兩寒峙) 모두 서쪽 통로다.”7)라고 기록되어 있고, 1829년에서 1831년 사이에 편찬된 것으로 보이는『관동지』13권에는 “영로(嶺路) 연수파령은 서북쪽 75리에 있으며 오색령⋅필노령⋅박달령은 모두 서쪽 50리에 있는 인제계(麟蹄界)이다. 소동라령(所冬羅嶺)은 서쪽 60리에 있는 험한 절벽지로 경성으로 통하던 대로로 기린계(麟蹄界)이다. 구룡령(九龍嶺)은 서남쪽 60리에 있으며 강릉계(江陵界)이다.”8)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이 모든 역사기록에서 소동라령은 춘천 기린계라고 하고 있어 현재의 인재군 기린면 진동리를 경계로 하는 영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아래〈지도 2〉1834년도 지도인 청구요람에서 보듯이 귀둔까지는 인제현 관할이었으나, 기린면 진동리는 당시 춘천부 관할의 기린현에 속해 있었고, 구룡령 너머 홍천과 평창의 일부지역은 강릉대도호부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04.jpg

05.jpg


4. 하천기록을 통해서 본 소동라령

『 신증동국여지승람』인제현편 산천조와 『연려실기술』 별집16권 총지리, 다산정약용의 『산수심원기』 등에 보면 “미륵수가 하나는 소동라령(所冬羅嶺)에서 나오고, 하나는 소파령(所波嶺)에서 나오고, 하나는 서화현(瑞和縣)에서 나오고, 하나는 기린현(基麟縣)에서 나온다.”9)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같은 시대의 대표적인 지도인 〈지도 4〉김정호의『대동여지도』를 보면, 인제로 흘러드는 수계는 금강산 일대에서 발원하여 ‘서화현’으로 나오는 수계, ‘소파령’ 일대에서 발원하여 원통으로 흐르는 설악산 수계, 오대산 일대에서 발원하여 ‘기린현’을 거처 나오는 수계, 그렇다면 나머지 한 수계는 점봉산 일대에서 발원하여 귀둔지역을 경유하여 나오는 수계로 이 수계가 소동라령 수계일 수밖에 없는 바, 그렇다면 소동라령은 위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 기린현 진동리를 거쳐 곰배령과 귀둔, 하추리, 고사리, 합강정을 거치는 경로였음을 알 수 있다.

06.jpg

이는 1767년의『인제현 여지도』, 1776년『인제현 지승』지도, 〈지도5〉1800년『인제현 광여도』등에서도 소동라령은 현재의 한계령이 아닌, 귀둔고관묘, 추동, 고사촌, 임선대, 합강정, 인제현으로 이어지는 영로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07.jpg

뿐만 아니라, 양양지역의 하천기록을 보면,『신증동국여지승람』44권 양양도호부편에 “남대천(南大川)은 부 남쪽 2리에 있는데 강릉부 오대산(五臺山)에서 나오며 소동라령(所冬羅嶺) 물과 합치고 부 남쪽을 지나 바다로 들어간다.”10)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 양양남대천의 본류는 오대산이며 구룡령과 오색령에서 내려오는 물줄기에 북암령에서 나오는 물줄기와 합류하여 내려오다 읍내에서 오대산 본류와 합류하여 바다로 들어가므로 소동라령은 현재의 북암령을 경유해 기린현 진동리와 귀둔으로 이어지는 영로였을 것임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5. 거리기록을 통해서 본 소동라령

지금까지 고지도와 각종 문헌을 확인한 결과 소동라령은 박달령(연수파)와 조침령 사이에 위치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일부 고지도와 기록에서 양양부에서 소동라령까지의 거리를 60리라고 하고 있으나 이는 당시에는 거리를 측량하는데 한계가 있었으므로 잘못된 기록을 답습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세종실록지리지(1454년)』강원도 강릉대도호부 양양도호부편에 “소동라령”을 “소등라령(所等羅嶺)”이라 표기하고 “소등라령은 요해처(要害處)로 양양부(府) 서쪽 인제경계로 36리”라고 기록하고 있으며,11) 1923년『양주읍지(현산지)』에는 “소동라령은 부에서 서쪽으로 30리”12)라고 기록하고 있다.

08.jpg

이는 『여지도서』와 『관동읍지』관애편에 오색령은 50리, 필여령은 40리, 조침령은 45리라고 한 점에 비추어 백두대간 능선의 지형으로 볼때, 필여령과 조침령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는 소동라령은 당연히 양양부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을 수밖에 없으므로 위의 양양부에서 30리에서 36리가 맞는 기록일 수밖에 없다.


6. 소동라령과 소어령, 북암령

그렇다면 지금까지 밝혀진 역사기록들을 바탕으로 소동라령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보고자 한다.
남효온(南孝溫 1454~1492)의『유 금강산기』를 보면 “(낙산사에서) 20리쯤 가서 양양부(襄陽府) 앞의 냇가에 이르러 말을 쉬게 하였다. 또 10리를 가서 설악에 들어가 소어령(所於嶺) 아래 고개에 오르니, 냇물은 왼쪽에 있고 산봉우리는 오른쪽에 있다. 산기슭을 다 지나 냇물을 건너 왼쪽으로 가니, 산은 맑고 물은 빼어나며 흰 바위가 서로 포개진 것이 대략 금강산 대장동(大藏洞)과 같다. 물줄기를 따라 올라가서 오색역(五色驛)에 이르니 산의 달이 이미 흰빛이었다.”13)라고 기록되어 있다.
양양에서 오색으로 향하노라면 중간쯤 지점에 반드시 거쳐야하는 고개가 있다. 일명 발딱고개라고 하는데 예전에는 한령(寒嶺)이라 불리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보이는 마을이 송어리와 송천리이다. 이는 일본인들이 만든 지명으로 지금도 옛 지명인 소어(所於), 소래(所川)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두 마을 사이에 있는 마을이 북암리(北崦, 北庵里)로 인제 진동리로 연결되는 대로의 옛 고갯길이 있다. 지금은 북암령이라고 불리고 있으나 이 고개의 옛 지명이 소어령, 소동라령이었다. 이는 박달령이 일본식 한자인 단목령(檀木嶺)으로 바뀌었듯이 북암령이라는 지명도 1916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북애미14)를 일본식 한자인 북암리로 고친 후, 영의 이름도 일본식 지명인 북암령으로 고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대로인 옛길은 있는데 고지도에는 소동라령만 있을 뿐 소어령이나 북암령이라고
표기된 영이 없기 때문에 소동라령의 다른 이름임을 짐작할 수 있다.『유금강산기』의 남효온선생도 소어령 아래 고개를 지나 오색으로 갔다고 하고 있어 소동라령 아래 한(寒)고개나 망령(望靈)고개를 지나 오색으로 갔음을 알 수 있다.

09.jpg

이를 종합해보면 〈지도 7〉에서 보듯이 소동라령은 양양에서 남대천을 따라 올라오다 망령고개(望靈峙)나 한령을 넘고 소천이나 소어리를 거쳐 지금의 북암령을 넘어 기린현내 진동리와 곰배령을 거쳐 귀둔, 추동, 고사촌, 합강정을 경유해 인제로 연결되는 영로였다.


7. 현지 실사를 통해서 본 소동라령

『신증동국여지승람』제45권 강원도(江原道) 간성군편에 보면 “미시파령(彌時坡嶺)은 고을 서남쪽 80리 쯤에 있다. 길이 있으나 예전에는 폐지하고 다니지 않았는데 성종(成宗) 24년에, 양양부 소동라령(所冬羅嶺)이 험하다 하여 다시 이 길을 열었다.”15)고 적고 있고,『신증동국여지승람』양양부 산천조에도 “소동라령(所冬羅嶺)은 부 서쪽 60리에 있으며 겹쳐지고 포개진 산맥에 지세가 험하고 궁벽지다. 예전에는 서울로 통하는 길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16)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소동라령으로 추정되는 북암령을 실사한 결과 귀둔(耳屯,耳呑)에서 진동리로 연결되는 곰배령은 텔레비전 드라마의 영향으로 이미 옛길 탐방코스로 변해있었고 진동리 삼거리에서 북암령 정상까지는 고개가 완만하며 일부 도로는 유실되었으나 옛길의 도로폭도 2m정도로 우마차가 다녔음직한 대로였으며, 정상에는 위에 이정표를 세웠음직한 돌무지가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6척(尺)을 1보(步), 360보를 1리(里), 30리를 1식(息)이라고 하고 10리마다 작은 표식을, 30리마다 큰 표식을 세우며, 30리마다역을 1개소씩 설치하도록 규정하였고, 일정한 거리마다 돌무지를 쌓고, 장승을 세워 도로의 리수와 지명을 기록한 도로표지를 설치하였다.”고 한다.17) 영 정상의 돌무지는 정상 주변에는 돌이 없고 돌의 규격도 고른 것으로 보아 일부러 돌을 옮겨 쌓은 것으로 보여 국가에서 관리하던 영로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고, 양양에서의 거리가 30리였음도 짐작할 수 있었다.
정상에서 북암리 방향은 급경사였고 계곡을 따라 길이 형성된 관계로 폭우로 많은 구간이 유실되어 있었으나 나라에서 영로를 폐지한 지 600여년이 지났음에도 많은 구간에 도로의 형태가 남아있었고, 노폭은 서쪽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2미터 이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북암령을 접어들기 위해서는 양양에서 한(寒)고개(발딱고개)나 망령고개까지 넘어야 했으므로 지세가 험한 궁벽지라는 기록을 실감하게 했고, 국가의 영로로서 비만 오면 유실되는 급경사인 소동라령을 관리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국가에서는 소동라령을 폐지하였음에도 지역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조선말까지도 일반인들은 이 영을 많이 이용했다고 하고 있으며 이를 입증이나 하듯이 1911년 조선지지자료를 바탕으로 만든 『강원도 땅이름의 참모습』인제편 영치현명(嶺峙峴名)에 보면 곰밴령(丁嶺, 곰배령)을 양양으로 통하는 영로라고 기록하고 있고, 여행자들이 민가에서 자야하는 불편을 덜어주기 위해 국가에서 관장하던 원(院)이 조선후기에 들어가면서 그 기능이 쇠퇴하자 주막(店舍)이 그 역할을 떠 맞게 되었는데 길손들이 먹고 자던 주막이 진동리에 갈터주막, 삼거리주막, 귀둔리에 버덤말주막, 곰배골주막, 하추리에 가래울어주막, 당수터주막, 원대리에 안삽재주막 등이 구간에 특별히 주막이 많이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아 얼마나 길손들의 많은 영로였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Ⅲ. 옛 한계령의 위치


위에서 우리는 지금의 한계령이 소동라령이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고 소동라령의 위치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렀다면 지금의 한계령이 옛날의 한계령은 맞는 것일까?
조선시대에도 한계령이라는 지명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옛 한계령의 위치를 찾아 바로잡는 일 또한 중요하다고 본다.


1. 역사기록으로 본 한계령

10.jpg

『대동지지』강원도 인제현 영로편에 “連水坡嶺東七十五里杆城界迂回絶險五色嶺弼奴嶺朴達嶺俱東七十里襄陽界”라고 쓰고 상단 여백에 所冬羅嶺,寒溪嶺”이라고 쓰여 있는 바,『대동지지』의 전반적인 기록형태를 보면 쓰는 과정에서 누락된 부분을 상단에 추가로 기록하고 있어 당시에 오색령과 함께 한계령도 다른 곳에 있었다고 봄이 타당하다.

11.jpg

12.jpg

그런데 1959년(단기 4292년) 인제군 북면에서 작성 보고한 지명조사철18)을 보면 한계령을 “영동과 통하는 오색이영의 나즌 영으로서 한계지역에 있다 하여 한계령이라고 하나 오색이영이라고도 함”이라고 보고하고 있어 현재의 한계령(오색령)은 옛 한계령이 아니며 옛 한계령은 한계지역에 있는 오색령 보다 낮은 영으로서 넓게는 오색령의 일부임을 알 수 있고, 일제가 만든 지도에는 오색령을 한계령이라고 적고 있음에도 인제지역에서는 해방 후인 1959년 당시에도 현재의 한계령은 오색령으로 불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옛 한계령의 위치를 찾아보자.
한계령의 위치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지도일 것이다. 그런데 고지도를 보면 양양에서 오색역을 거쳐 인제로 연결되던 대로인 오색령은 모든 지도에서 볼 수 있으나, 이용이 많지 않았던 한계령은 유일하게 동여도에서 볼 수 있다.
그런데 〈지도 8〉동여도에도 오색령과 한계령은 다른 영로로 함께 기록되어있으며 오색령은 고대로(古大路)라고 표기되어 있다. 뿐만아니라 한계령은 오색령보다 더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백담천을 거쳐 남교역과 연결되고 있는 것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남교리에서 계곡을 타고 오르다 한계산(산성)의 정상인 안산과 귀때기청봉으로 이어지는 경로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김몽화의『유설악록』에서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13.jpg

김몽화의 『유설악록』을 보면 “대승령에 올라 돌아보니 어젯날 만경의 오세암, 남대의 영시암, 좌우 봉의 만경 모두 무릅 아래요, 봉정암이 앞을 가리고 있어 밑은 볼 수 없었다. 산허리 10리에 참으로 한계의 관폭대에 오르니 구천은하(九天銀河)라고 크게 네 글자가 새겨져있다. (생략) 관폭대 아래의 길은 아주 험준하여 갈수 없고 많은 돌들이 이빨처럼 쪼개져 겁나며 장차 갈라져 떨어질 것같이 그윽하게 세워져있어 혹 이런 꿈을 꾸지 않기를, 한계령을 향하다가 아름다운 수석을 만난 곳에서 가마를 세우고 쉬면서 개울물을 떠 마시고 물에 밥을 말아먹었다. 개울에 큰 바위와 바위의 좌우에 단풍이 비치므로 정차암이라고 청하여 불렀다. 오색이라 하는 이 영을 넘으니 석봉의 기풍이 힘 있게 나열된 설악산의 한가지다. 여기에서 묵으니 오색촌이다.”19) 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서 관폭대 아래의 길은 험준하여 갈수가 없다고 하고 있고, 한계령을 향했다고 하고 있으므로, 한계천(장수대, 한계사가 있던 곳)으로 내려와 오색령을 넘은 것이 아니라 대승령에서 능선을 따라 귀때기청봉으로 향하는 경로로 오색령을 넘어 오색에 이르렀다고 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계령은 대승령에서 귀때기청봉, 오색령으로 연결되는 코스에 있다고 본다.


2. 한계령이 고지도에 나타나지 않는 이유

한계령은 동여도 이외의 고지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허목(許穆)은『동유박물(東遊搏物)』에서 “한계(寒溪)의 남쪽 봉우리는 절벽이 위험한데 그 맨 위는 몹시 높고, 그 아래는 더욱 깊다. 산석(山石)의 빼어난 정기는 높고 험하여 명상(名狀)하기 어렵다.”고 했고, 김몽화는 『유설악록』에서 “관폭대에 오르니 구천은하(九天銀河)라고 쓰여 있다”고 했으며 정약용의 산수심원기를 보면 “한계산기(寒溪山記)에 이르기를 한계산은 높고 크며 기이하고 절승하여 영동(嶺東)의 으뜸이다. 산 위에 성(城)이 있고 물이 있는데, 그 물이 성안으로부터 흘러나와 폭포를 이루어 그를 대승폭(大勝瀑)이라 하며 수백 길 높이에서 현류(懸流)하여 바라보면 마치 흰 무지개가 하늘에서 드리운 듯하다. 원통역(圓通驛) 동쪽으로부터 좌우가 모두 큰 산으로서 골짜기가 깊숙하고 시냇물이 종횡으로 흘러 돌다리를 건너는 곳이 서른여섯 굽이나 된다. 빽빽하게 들어선 나무는 하늘
을 찌를 듯 위로만 솟아 옆으로 뻗은 가지가 없으며 그 중에도 송백이 더욱 높아 그 끝을 볼 수 없다. 또 그 남쪽 봉우리의 절벽은 1천 길이나 깎아질러 그 기괴함을 형언할 수 없는 형세라, 나는 새도 능히 건널 수 없으며 행인들은 곧 바위덩이가 떨어져 눌릴 듯한 공포를 느낀다. 그리고 그 밑에는 험한 암석으로 못을 이루었는데 사람이 앉을 만한 반석도 있다.
또 동쪽 몇 리 길은 동구(洞口)가 몹시 협착하고 좁은 길은 벼랑을 끼고 돌아가는데, 암석은 입을 벌린 듯 함하(唅呀)하고 산봉우리는 뾰족뾰족 빼어나 마치 용이 후려치고 호랑이가 덮치듯 누누이 층대를 이룬 것이 무수하다. 그 수맥은 모두 곡담(曲潭)ᆞ한계(寒溪)의 근원이다.”고 하였듯이20)이 도로는 안산(한계산성)에서 대승폭포, 귀때기청봉, 소승폭포로 이어지는 기암 절경지로서 예로부터 풍류객들이 즐겨 찾던 이 구간에 있었던 영이 한계령으로 일반인들은 길이 험하여 주로 이용하지 않았으므로 일반적인 고지도에는 표기하지 않았다고 봄이 타당하다.



Ⅳ. 한계령이 오색령인 근거들


1. 한계령의 옛 지명은 소솔령

우리는 소동라령이나 한계령은 지금의 한계령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한계령인 옛 지명을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1589년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한 팔곡 구사맹(八谷 具思孟)의『팔곡집(八谷集)』에 한계산(寒溪山) 시(詩)의 주석(註釋)을 살펴보면 “양양에서 소솔령(所率嶺)을 넘어 인제로 이어지는 많은 사람들이 한계사(寒溪寺 : 장수대 인근의 절)에서 투숙함으로 이들을 접대하기 힘들고 감내할 수 없어 스님들이 절을 버려두고 떠나 절은 허물어져 빈터만 남아있다···”21)라고 적고 있다. 또한, 추강 남효온(秋江 南孝溫, 1454~1492년)의『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에 “오색역(五色驛)을 출발하여 소솔령(所率嶺)을 올라 여기를 소금강산이라 부르는 것이 빈말이 아니구나, 하고서 영(嶺)위에서 동해를 하직하고 원통을 지나 인제현(麟蹄縣)에서 묵었다."22)라는 기록이 있다.
이를 종합하면 오색에서 장수대(한계사)를 지나 인제를 통하는 지금 한계령의 옛 이름은 소솔령이었다.


2. 소솔령이 오색령인 근거

문헌에 오색령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 찾을 수 있다. 선조실록 권72(宣祖實錄卷七十二) 1596년 2월 1일(戊戌)에 비변사(備邊司)가 아뢰기를 “적병이 경상도의 영해(寧海) 연해를 따라 북상하게 되면, 평해와 울진이 가장 먼저 적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곳을 만약 지키지 못하여 적병이 깊숙이 영동(嶺東)으로 침입하면, 추지령(楸池嶺)⋅미수파[(彌水坡)⋅오색령(五色嶺)⋅백봉령(白鳳嶺) 등의 곳은 모두 영(嶺)을 넘는 길이 될 것이니, 방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23)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토록 이용이 많았던 소솔령(所率嶺)이라는 고개명은 이때부터 모든 기록과 지도에서 사라지고 오색령(五色嶺)이라는 지명이 등장한다. 이는 임진왜란을 치르면서 복잡한 고개명칭(소파령,소솔령,소어령,소동라령 등)의 혼돈으로부터 오색역을 지나는 영로라는 지명을 통해 고개의 위치를 쉽게 기억하기 위함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김수증(金壽增)의『한계산기(寒溪山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691년(辛未) 5월 9일(甲午)의 기문(記文) 중에 “한계사(寒溪寺) 옛터를 지나니 북쪽편의 모든 산봉우리들은 곧게 솟아 있고, 나무들이 무성하여(생략) 개울가 돌 위에서 점심을 먹고서, 지나가는 스님을 만나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니 곧 대답하기를 오색령(五色嶺)을 경유하여 양양(襄陽)으로 가는데 거리는 약 80리가 된다.”24)라고 기록되어 있다. 위에서 우리는 양양에서 오색을 거쳐 한계사 터를 지나 인제로 가는 영이 소솔령임을 기록을 통해 확인했었다. 그런데 한계사 옛터를 지나면서 지나는 스님에게 어디를 가느냐고 물으니 오색령을 거쳐 양양으로 간다고 하고 있다. 이로서 소솔령이 오색령으로 이름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양와 이세구(養窩 李世龜)의『양와집(養窩集)』에 1691년(辛未) 10월 3일(甲申) 동유록(東遊錄)에도 “조침령의 북쪽은 오색령이고 그 동쪽은 양양(襄陽)이고 서쪽은 인제(獜蹄)이며 오색령 북쪽에 미시파령을 이룬다.”라고 적고 있으며25) 식산 이만부[(息山 李滿敷)의『금강산총기』서두에 “대체로 우리나라의 산은 백두산에서 비롯되었으며 백두산(白頭山)의 낙맥(落脈)이 남으로 흘러 철령에 이르며 남북의 경계를 이룬다.
이곳에서 동으로 흘러서 추지령·쇄령·온정령 등 세 고개가 팔백리를 관통하며, 온정령에서 남쪽으로 삼십리 지점이 금강산이다. 금강산은 동해 바다를 따라 백리를 내려가 진보령이 되며 진보령에서 오십리를 더 가면 석파령, 그곳에서 삼십리를 더 가면 미치령, 다시 육십리를 가면 한계산이 되고, 다시 삼십리를 가면 오색령에 이르며, 이곳에서 구십리를 가면, 오대산에 이르고, 삼십리 거리에 대관령이 되고, 사십리 거리에 백복령이 되고, 백리 거리에 태백산과 황지가 된다. 이것이 금강산을 중심으로 한 그위 아래의 형승이 막히고 험준한 모습의 대략이다.”26)라고 적고 있다.
『증보문헌비고』양양 산천편(襄陽山川編)에 “양양 오색령은 서쪽 50 리에 있다. 산의 총설에 나타나 있다. 영로(嶺路) 오색령은 양양영로로 필여령과 함께 서로이며, 소동라령․조침령, 구룡령은 강릉로, 형제현, 양한치 모두 서쪽로이다. 인제 영로(麟蹄嶺路)는 미시령⋅흘이령⋅탄둔령⋅두모치⋅건리치⋅오색령⋅서파령⋅가노치⋅진보령이다.”27)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입증하듯이 앞에서 본 고지도들에서도 소솔령과 오색령이 함께 표기된 지도는 없으면서도 모든 고지도에서 소솔령이 사라지고 오색령이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이 한계사에 투숙객이 많아 이를 감내할 수 없어 절을 버리고 떠날 정도로 이용객이 많았던 소솔령 지명이 모든 지도에서 사라졌다면, 문헌상에 필여령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모든 지도에서 빠지지 않고 나타나는 오색령이 과거의 소솔령이 분명하다고 할 것이며 오색령은 당시에도 양양과 인제를 연결하는 가장 중요한 영로로 지금의 한계령임을 알 수 있다.



Ⅴ. 맺음말


고지도, 각종 문헌 등을 확인한 결과 과거의 소동라령, 오색령, 한계령은 일부의 주장과 달리 모두 서로 다른 영들임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소동라령은 고지도, 고문헌, 경계기록, 하천수계, 양양부에서의 거리기록, 현지답사 등을 종합한 결과 현재의 오색령이 아니라, 필여령 남쪽가지에 위치한 춘천 기린계로 연결되는 영으로, 양양에서 한령이나 망령고개를 넘은 후 소어리나 소래를 거쳐 지금의 북암령(일명 소어령)과 춘천 기린계였던 진동리, 곰배령(곰밴고개), 귀둔, 추동, 고사리, 합강정, 인제로 이어지는 영로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옛 한계령은 일반인들이 많이 이용되지 않던 고개인 관계로 동여도에만 설악산과 오색령 사이의 백담수를 거쳐 남전역으로 연결되는 고개로 표시되어 있어, 김몽화의 유 설악록과 연결시켜 볼 때, 남교리어령, 소동라령 등)이 가져오는 혼란을 막기 위해 오색역을 지나는 영인 소솔령을 오색령으로 부르게 되었고, 이는 모든 고 자료에 소솔령이 사라지고 오색령이 나타나고 있음도 확인할 수 있었다.
역사는 좋던 나쁘던 간에 사실대로 남겨 후손들이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므로 분명한 역사기록이 많이 남아 있음에도 특정 목적을 위해 이를 왜곡시키는 일은 없어야 한다.
특히 지명은 옛 문화를 간직한 인문학적 유산임을 감안할 때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후손에 물려주는 정신은 오늘을 사는 우리의 책무라고 하겠다.
에서 한계산성(안산), 대승폭포, 귀때기청봉을 지나는 능선을 통해 오색으로 이어지는 고개였음을 추정해 볼 수 있었다.
또한, 현재의 한계령(오색령)은 과거 소솔령임을 확인할 수 있었고 양양과 인제를 잇는 주도로로서 이용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음을 기록을 통해 알 수 있었으며 그 후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비슷한 영의 이름(소파령, 소어령, 소동라령 등)이 가져오는 혼란을 막기 위해 오색역을 지나는 영인 소솔령을 오색령으로 부르게 되었고, 이는 모든 고 자료에 소솔령이 사라지고 오색령이 나타나고 있음도 확인할 수 있었다.
역사는 좋던 나쁘던 간에 사실대로 남겨 후손들이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므로 분명한 역사기록이 많이 남아 있음에도 특정 목적을 위해 이를 왜곡시키는 일은 없어야 한다.
특히 지명은 옛 문화를 간직한 인문학적 유산임을 감안할 때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후손에 물려주는 정신은 오늘을 사는 우리의 책무라고 하겠다.


참 고 문 헌

『관동읍지』
『관동지』
『대동지지』
『동국여지지』
『만기요람』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양양군읍지』
『양주읍지』
『선조실록』
『여지도서』
『증보문헌비고』
김몽화,『유 설악록』
남효온,『유 금강산기』
구사맹,『팔곡집』
안경석,『삽교집』
이만부,『금강산총기』
이만부,『지행록』
정약용,『산수심원기』
허목,『동유박물』
허목,『삼척기행』
신종원,『강원도 땅이름의 참모습』경인문화사, 2007
한글학회, 『한국지명총람』, 1967
양양군,『양양군지』2009
인제군,『지명조사철』1959

-----------------------------------------------------
1)『한국지명유래집』 국토해양부 국토지리연구소, 2008. 제5부 강원도 인제군 689p
2)『지금의 한계령과 오색령에 대한 연구』최병헌, 2012, http://blog.daum.net/bhunc1/8224402
3)『여지도서』 江原道 襄陽 / 關阨편
五色嶺 在府西五十里卽是雪嶽南枝接麟蹄界, 弼如嶺 在府西四十里卽五色嶺南枝接春川 猉麟界所冬羅嶺 在府西六十里卽弼如嶺南枝接猉麟界舊有路通京中今廢 阻沈嶺 在府西四十五里卽所冬羅南枝接猉麟界 九龍嶺 在府西七十里卽阻沈南枝接江陵 金川面界 兄弟峴 在府西四十里向五色嶺路兩峴對峙相似故名 兩寒峙 在府西二十里向九龍嶺路
4)『관동읍지』관애편
五色嶺在府西五十里卽是雪嶽南枝接麟蹄界 弼如嶺在府西四十里卽是五色嶺南枝接春川掑獜界 所冬羅嶺在府西六十里卽弼如嶺南枝接掑獜界舊有路通京中今廢 阻枕嶺在府四十五里卽所冬羅嶺南枝接掑獜縣界 九龍嶺在府西七十里卽阻枕南枝接江陵金川面界
5)『 江原道 襄陽郡邑誌 二』
所冬羅嶺 在府西六十里 卽弼如嶺南枝接掑獜界舊有路通京今廢
6)『대동지지(大東地志)』양양, 영로조
五色嶺 弼奴嶺 朴達嶺 俱西五十里獜蹄界. 所冬羅嶺 西六十里絶險舊有通京大路獜蹄界.
7)『만기요람(萬機要覽)』군정편4(軍政編四) 관방(關防) 강원도(江原道)
襄陽嶺路 五色嶺 弼如嶺 猉麟路 所冬羅嶺 阻沈嶺 九龍嶺 江陵界 兄弟峴,兩寒峙 幷西路.
8)『關東誌』 제13권
嶺路連水坡嶺西北七十五里五色嶺弼奴嶺朴達嶺俱西五十里麟蹄界所冬羅嶺西六十里絶險舊有通京大路麟蹄界九龍嶺西南六十五里江陵界.
9) 輿覽云彌勒之水。一出所冬羅嶺。一出所波嶺。一出瑞和縣。一出基麟縣。
10)『신증동국여지승람』 제44권 / 강원도(江原道) 양양도호부(襄陽都護府)
南大川 在府南二里出江陵府五臺山 與所冬羅水合流經府南入海
11) 要害自本府西去麟蹄境所等羅嶺三十六里
12) 所冬羅嶺在府西三十里
13) 至襄陽府前川上歇馬。又行十里入雪岳。陟所於嶺下峴。則川水在左。峯巒在右。過盡山麓。涉川流而左。山明水秀。白石交加。略如金剛山大藏洞。沿流而上。至五色驛。山月已白矣。是日。陸行三十里。山行四十里。
14)『한국지명총람』한글학회, 1967, p217
15)『신증동국여지승람』제45권 강원도(江原道) 인제현
彌時坡嶺在郡西南十里許有舊廢不行 成宗二十四年以襄陽府所冬羅嶺險危復開興路
16)『신증동국여지승람』양양부 산천조
在府西六十里重巒疊嶂地勢險阻舊有路通京師今廢
17)『양양군지』 양양군, 발행일 2010, 11, 30, 163페이지 교통과 통신
18) 자료 : 국토지리정보원
19) 김몽화(金夢華) 『칠암문집(七巖文集)』<유설악록(遊雪嶽錄)>
登大乘嶺回視日昨經過處五歲之萬景永矢之南臺晩頃之左右峯皆재膝下獨鳳頂爲前峯所遮而不可見下山腰十里寔爲寒溪登觀瀑臺有九天銀河四大字刻此政乾坤逞技』『之處造化得意而成者也此之昨日所見十二瀑則細柳之眞將軍棘門㶚上之兒戱必有能下之者矣臺下路絶險下臨無地間多石齒鑿鑿惴惴然如將隕墜班孟竪幽入之夢無或類此歟向寒溪嶺遇水石佳處舍輿息肩酌溪水澆飯而喫溪上有巨巖巖之左右丹楓映請名之曰停車巖踰嶺是爲五色石峰峭抜羅列雪嶽之一支也止宿于五色村
20) 다산시문집>다산시문집 제22권>잡평(雜評)산수심원기(汕水尋源記)
寒溪山記云寒溪山高大奇峻。甲於嶺東。山上有城。有水自城中流出。卽成瀑布。名大勝瀑。懸流數百丈。望之如白虹垂天。自圓通驛而東。左右皆大山。洞府深邃。溪水縱橫。矼涉者三十六曲。樹木如簀。上竦雲霄。旁無橫枝。松柏尤高。不見其巓。又其南峯絶壁。高可千仞。奇怪莫狀。禽鳥不能飛度。行人疑遭壓墜。其下觸巖成潭。盤石可坐。又東數里。洞口甚狹。細徑緣厓。窾穴唅呀。峰巒峭拔。如龍拏虎攫。爲累層臺者無數。其水脈皆曲潭寒溪之源也
21)『팔곡집(八谷集)』 한계산(寒溪山) / 시(詩) / 주석(註釋)
古寺 卽寒溪寺 自襄陽所率嶺 抵麟蹄舊路 經由寺下往來人 必投宿于寺 寺僧不堪迎接之苦 不肯居住 遂致空廢 今則頹圮己久 只有舊基 砌礎宛然 曾是巨刹也
22)『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추강 남효온[(秋江 南孝溫)
乙未。發五色驛。度所率嶺。雪岳亂嶂。無慮數十餘。峯皆頭白。溪邊石木亦白。俗號小金剛山。非虛語矣 ...余於嶺上辭東海...自元通履平地...宿麟蹄縣.
23) 備邊司【去正月三十日, 備忘記回啓也】啓曰: ……賊兵由慶尙道寧海, 沿海以北, 則平海蔚珍, 當先受敵。 此處若失, 而賊兵深入於嶺東, 則楸池嶺、彌水坡、五色嶺、白鳳嶺等處, 皆爲踰嶺之路, 不可不備也。……
24) 考亡何歷寒溪寺舊基。北面諸峯矗立森羅。(생략) 至溪邊石上午飯。逢過去僧。問 其何向。則
曰由五色嶺至襄陽。蓋此距海路八十里云。
25) 曹砧之北爲五色嶺。其東則襄陽。西則獜蹄。五色之北爲彌時坡嶺.
26) 大抵我東之山 起自白頭 白頭之脉 南流至鐵嶺 限南北界 東迤爲楸池 鎖 溫定三大嶺 通八百里溫定南三十里 爲金剛 金剛東遵海百里爲眞寶嶺 五十里爲石坡嶺 三十里爲 彌峙嶺 六十里爲寒溪山 三十里爲五色嶺 九十里爲五臺山 三十里爲大關嶺 四十里爲百複嶺 百里爲太白·黃池. 此其上下形勝阻阨大體也.
27)『增補文獻備考』卷二十八
襄陽 五色嶺在西五十里右諸山見總說 嶺路五色嶺見襄陽嶺路 弼如嶺並西路 所冬羅嶺 阻沈嶺 九龍嶺江陵路 兄弟峴 兩寒峙並西路 麟蹄嶺路 味施嶺……屹伊嶺 炭屯嶺……頭毛峙……建里峙……五色嶺 見襄陽嶺路 西坡嶺並東路 加奴峙南路 眞寶嶺北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