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32호

2월 - 구룡령과 갈천약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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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317회 작성일 2021-02-26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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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룡령옛길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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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령 옛길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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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령 옛길>

 

구룡령 옛길은 과거 영동과 영서를 잇는 물물(物物) 교역로로 이용되었고, 넓은 도로가 없던 시절 양양과 고성지방 사람들이 한양을 갈 때 주로 이 옛길을 이용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선비들이 과거를 치르러 한양을 갈 때 명칭에서 유래하듯 용의 영험함을 빗대어 과거급제를 기원하며 넘나들던 길이라 하였다.

구룡령 이라는 이름은‘아홉 마리 용이 고개를 넘다가 지쳐서 갈천리 마을 약수터에서 목을 축이고 아흔아홉 구비를 쉬엄쉬엄 넘어갔다고’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전하고 있으며, 또한‘아흔 아홉 구비 고개 길이 龍이 지나간 자리처럼 구불구불하다하여’九龍嶺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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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령 옛길 묘반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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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령 옛길 금강송 군락>

 

 

명종 9년(1554년)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석천 임억령(石川林億齡)이 구룡령의 자연을 읊은 시를 비롯하여 많은 관리와 문인들이 시부(詩賦)로 노래했다.

조선시대 양양군과 홍천군의 경계를 확정할 때 양양부사가 새벽 일찍 동헌을 출발하여 이 영(嶺)길을 넘어 창촌에서 홍천부사와 만나 경계를 짓고 경계표지석을 세웠다고 한다, 이때 한 치의 땅이라도 더 넓히려고 이 영(嶺)을 빨리 넘으며 달리다 지쳐 숨진 양양의 애향 청년이 묻혔다는 묘가 있어 이 영(嶺)을 넘을 때 숙연함과 애향심을 북돋게 한다.

옛길의 중간에는 길의 위치를 표시하는 금강소나무, 묘반쟁이, 솔반쟁이, 횟돌반쟁이 등이 자리하여 있고, 주변에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옛길을 걷는 이들에게 한층 흥미를 더해주며 삼림욕의 극치를 느끼게 하고 있다.

2007년 12월 17일 문화재청에서 국가명승 제29호로 지정하여 보호관리 하고 있다.




■ 갈천마을유래와 갈천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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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천약수>

 

갈천리 마을 이름은 칡뿌리에서 나왔다.

화전민이 주로 자리 잡고 살았던 산골마을이라 논이 없다보니 주로 밭에 잡곡 농사를 많이 지었는데 춘궁기가 되면 칡뿌리로 연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마을 앞을 흐르는 하천이 칡가루 일색이기 때문에 갈천 또는 치래(칡내)라고 불렀으며, 한동안 칡가루가 위장병에 약이 된다하여 칡가루를 이용한 칡 국수가 별미로 각광을 받기도 하였다.

마을에서 서쪽 골짜기를 20여분 걸어 올라가면 바위틈에서 철분이 많이 함유되어 있는 약수가 솟아나는데, 이 약수는 농도가 강하여 위장병과 피부병에 좋다고 하여 비록 먼 곳에 소재하고 있어도 병을 치료하려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기도 한다.




■ 구룡광산이야기



마을 위쪽에는 철광석을 채광 하였던 옛구룡광산의 폐석 더미가 남아있다. 철 함유량이 52%인 양질의 자철광으로서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1940년대 초에 일제가 구룡령 입구에 대장간을 차려놓고 철을 캐는데 사용하는 도구를 만들어 철을 채굴했고 당시 별칭으로“인발구”라고 불리는 손수레를 소달구지처럼 만들어 인부들이 철을 싣고 썰매처럼 끌어 내린 후 산 중턱에 설치한 삭도[케이블카]를 이용해 산 아래 선광장으로 옮긴 후 목탄차를 이용해 1945년 해방 전까지 철을 캐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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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구룡광산 삭도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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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구룡광산 갱도>

 

 

1963년 이후 양양광산 함태 광업소에서 철광석 채굴을 재개하면서 부터 착암기를 사용하였는데, 이때 지역 주민과 외지인들을 포함한 근로자들이 약 7~8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당시 월간 300톤 규모의 철광을 생산하여 속초항으로 운송하여 일본으로 수출하였으나, 생산 규모가 영세하고 열악한 도로 여건으로 운송이 어렵고 유류파동으로 채산성이 악화되어 1970년대 이후 생산이 중단되고 말았다.

현재 원형이 보존되어있는 갱도는 한곳이 있으며 갱도입구가 함몰된 곳이 두개가 더 있었다고 한다. 예전에 철광석을 운반하는데 사용하였던 케이블카 시설이 지금도 남아있다.




■ 갈천분교이야기



갈천 마을에서 유일한 관공서였던 갈천분교는 1949년 4월 1일 2학급으로 편성하여 현서초등학교 갈천분교장으로 개교를 하였고, 이후 인구증가로 마을이 번성하게 되자 마을의 각종 큰 행사를 치르는 등 지역의 중심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한때 갈천에 광업소가 운영되면서 100여명의 학생들이 공부를 하였으나, 최근 점차적으로 인구가 감소되어 학생 수가 감소되었으며, 1996년 3월 1일 상평초등학교 갈천분교장으로 편입되었다가, 1999년 2월28일 상평초등학교로 통합되면서 갈천분교는 문을 닫았으며, 현재 갈천분교는 마을에서 산촌 체험장으로 운영하고 있다.

참고로 갈천분교는 6·25 한국전쟁 후 나무판자로 지은 건물로 도내에서 유일하게 목조로 지은 건물로 영구적으로 보호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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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천분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