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34호

Ⅲ. 양양 대포영지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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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85회 작성일 2023-02-06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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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봉산성(五峯山城)


■ 소재지 :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전진리. 조산리 오봉산(낙산산성) 이며 지방문화재 제33호이다.


■ 위치 및 현상

오봉산고성(五峯山古城)은 洛山寺 寺城을 둘러싸고 있는 토석혼축성(土石混築城)의 포곡형으로 봉우리와 봉우리를 연결하여 성곽을 축조하였다. 낙산산성은 기록 17) 에 의하면‘낙산사가 있는 오봉산을 둘러싼 고성으로 설악산의 동쪽 한 가지가 동해안에 머무른 곳에 흙으로 쌓아 졌으며 그 양양도호부 북쪽 혹은 동북쪽 15리에 있는 오봉산 일명 낙산에 홍예석문을 가진 낙산사가 있다’고 하였다. 다른 이름으로 낙산산성(洛山 山城)이라 하는데, 오봉산성(五峯山城)은 성곽의 전체 길이는 약 1,150m, 높이는 잘 남아있는 부분이 약 1,5m, 폭 약 2m이다. 전체적으로 성벽은 잘 남아있으나 일부 무너진 것이 있어 정비 복원이 시급하다고 본다. 18) 라 했다.

이곳 오봉산산성은 채집기와 등의 유물 등을 살펴볼 때 고려시대 이후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사료되며, 왜구의 침입 등에 대비한 사찰 자체방어 시설로 유추할 수 있다. 19)

따라서 양양의 대포영이 본 사찰을 중심으로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남쪽으로 약 2km 지점의 남대천 하구는 대포진(大浦鎭)이 설치되어 선척(船隻)의 입출항이 용이하여 적의 해상 침투방어 전진기지(前進基地)로 활용하였을 것으로 사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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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오봉산성 위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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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 오봉산성 채집기와




2. 대포영지(大浦營址)


■ 소재지 :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조산리 성내 말

■ 위치 및 현상

양양의 대포영지(大浦營址)는 대포성과 같은 것으로 추정되나 기록에는 따로 분류하였다. 20) 고 했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보면 진보(鎭堡)와 관방(關防)인 대포영은 양양 동쪽 12리에 위치하며 강릉 안인포에서 조선 성종 21년(1490)에 양양으로 옮겨 왔고 중종 15년(1520년)에 석축을쌓았는데, 성곽 둘레가 1,469척(445.1m)에 높이가 12척(3.6m)이다 21) 라고 했다.

대포영은『대동지지(大東地志)』·『동국여지지(東國與地志)』·『여지도서(與地圖書)』·『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등에도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자료의 끝부분에 공통으로 금폐(今廢)라 했다. 이 시기가 언제인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추정할 수밖에 없다. 1976년 양양문화원이 발행한『鄕土誌』에는 인조 4년(1626년)에 혁파(革罷)하였다. 22) 라고 하였다.『 朝鮮寶物古跡調査資料』에는 "성지(城址) 양양면 조산리 마을에 근접한 서방봉근(西方峰筋)에 있다. 주위 약 삼백간(約三百間) 토축 일부 석축 불완전(不完全) 23) ”이라 하였다.

『文化遺蹟總覽』上卷에는“1490년 안인진에서 옮겨 왔으며 1520년 석축(石築)으로 수축(修築)한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은 모두 허물어졌는데 성내(城內)에서 초기철기시대의 토기편이 발견되고 있고 토성은 이때부터 있었던 것인지도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강릉대학교 박물관과 양양군에서 공동으로 발간한『襄陽郡의 歷史와 文化遺蹟』에는 대포성지의 모양은 평면 삼각형으로 낮은 구릉과 평지를 연결한 평산성으로 성(城)의 남서편(南西便)은 문지로 추정되고, 동편 성벽자른 면에 큰 화강암 석재가 3∼4단으로 남아있고 성 안쪽에는 동명서원과 민가 2채가 자리하고 있다. 성벽의 전체 폭은 약 4m 정도이고 외벽은 잘 다듬어진 석재로 쌓았으며 안쪽 면은 토축(土築)이다. 성의 동쪽 끝과 북쪽 끝은 가장 높은 지역으로 해발 약 33m와 45m 높이로 급격히 돌아가는 것으로 보이는 성곽으로 추정된다. 성의 북쪽 면에는 도로가 나 있 는데 북문지로 추정되며 안쪽에서 보아 죄측 면에는 문지의 기초석이 잘남아있다. 성(城) 안쪽 면은 대부분이 경작지로 변하여 알 수 없는 상태이나 성벽 외각 전체 길이는 약 550m이고, 폭은 약 4m이다. 전체적으로 성곽이 잘 남아 있으나 북쪽 면은 군(軍)의 교통호 설치로 일부가 파괴된 상태이다. 24) 라 했다.

성안에는 시멘트로 만든 우물이 있는데 우물 외부에는장방형의 보호 시 설이 설치되어 있는데“庚午 7月 建設”이라고 음각된 글자가 보인다. 경오(庚午)라면 일제강점기인 1930년에 만든 것으로 지금으로부터 90여 년 전이 된다. 우물의 시설 규모는 밑바닥 주변에는 깬 돌로 50cm 높이로 쌓았고 그 위에 시멘트로 보호대를 4m정도 깊이로 쌓았다. 보전되어온시설의 규모로 보아 협소하고 보잘것없다 하겠으나, 역사적인 측면에서 대포영성과 연관 지어 좀 더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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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8> 현 대포영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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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9> 현 대포영지 석축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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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0> 大浦營城 위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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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1> 대포영지 우물터로 추정

 



3. 대포영 관사를 학사(學舍)로 활용


양양군 양양읍 조산리에 소재한 동명서원(東溟書院)은 인조 6년(1628)에 건립되었다. 당시 양양도호부사(襄陽都護府使) 조위한(趙緯韓)은 흥학(興學)에 뜻을 두고 그 방안을 강구 하던 중 대포영(大浦營)의 군용 건물이 방치되어 장차 헐리게 될 것을 발견하고 이곳을 학사(學舍)로 전용토록 하였으며, 이것이 서원이 건립되는 단초(端初)가 되었다. 서원 건립을 위해 숭모(崇慕)의 상징이 될 만한 선현을 물색하던 중 전정언 노경복(前正言/盧景福) 사림 최정립, 이현일 등의 향론으로 양열공 조인벽이 추 천되었으며, 이에 조위한부사의 협조로 강당 뒤편에 사당을 건립하여 忠

賢祠라 명명하고 조인벽을 봉향하였으며, 동명서원(東溟書院)으로 현판(懸板)하였다.

아울러 부사 조위한은 전답과 소금 굽는 가마와 어선 한 척을 지원하여 전속시켜 서원의 운영을 협조하였다.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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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2 > 동명서원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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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新增東國輿地勝覽』卷之四十四 襄陽都護府 山川 五峯山 在府東北十五里 或稱 洛山

『大東地志』卷十六 襄陽 城地 五峯山古城 土築 有紅霓石門 洛山寺在其中

18) 지현병·전유길 江陵大學校 博物館, 앞의 책 p.219.

19) blog.daum.net/kimseongsoo/11615926

20) 江陵大學校 博物館. 1994『 . 襄陽郡의 歷史와 文化遺蹟』p. 209.

21)『 新增東國輿地勝覽』卷之四十四 襄陽都護府 關防 大浦營 在府東十二里 成宗二十一年 自江陵安仁浦移泊于此 水軍萬戶一人 正德庚

辰築石城 周一千四百六十九尺 高十二尺

22) 襄陽文化院, 1976年『鄕土誌』p. 101.

23) 朝鮮總督府. 1942년『朝鮮寶物古跡調査資料』P. 542.

24) 지현병·전유길 江陵大學校 博物館,. 『襄陽郡의 歷史와 文化遺蹟』 1994年. p.212.

25) 지현병·전유길 江陵大學校 博物館, 앞의 책 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