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34호

Ⅱ. 양양 대포 명칭의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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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96회 작성일 2023-02-06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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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치


양양군 양양읍(襄陽邑) 조산리(造山里) 남대천 하구를 대포(大浦)로 지정하였다. 지정한 연대는 지금으로부터 530여 년 전인 조선 성종 21년(1490)이다. 대포에서 대포영(大浦營)까지의 거리는 서북향으로 약 500m에 떨어진 곳이다. 대포영 관저 앞쪽의 넓은 호수를 일명 조산호수(造山湖水)라 불렀다고 하는데, 예전부터 남대천 하구에서 대포영성 앞까지 하나의 큰 호수였다. 지금은 전답으로 조성되어 농사를 짓고 있지만, 윗대의 어르신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당시에는 어선들의 정박은 물론 투망으로 소상 어류를 잡아 생계를 유지하였다. 7) 고 한다.

양양부사 이해조〔李海朝(1660∼1711)〕의 현산 30영 (峴山三十詠) 중 제29영(第二十九詠) 8) 납호당망해〔納灝堂望海, 납호당에서 멀리 바다를 보다〕란 시를 보면,“ 남대천과 늪이 해자(垓子)처럼 겹쳐진 부족한 한쪽을 아름답게 꾸몄네.”라고 읊었다. 호수의 규모는 남대천 하구에서부터 대포영성(大浦營城) 앞까지인데 넓고 커서 선척(船隻) 9) 이 유사시에 원활히 해상작전을 전개할 수 있었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양양 남대천 포구(浦口)인 속칭 조산(造山)호수를 대포(大浦)라 불렀는데 『鄕土誌』자연환경, 하천과 호소(湖沼)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대포(大浦)는 다른 이름으로 황포(黃浦)라고 한다. 양양면(襄陽面) 조산리(造山里) 전방 남대천(南大川) 하류구(下流口)에 있다. 파도가 심하면 하구가 막혀서 호수(湖水)가 조산리(造山里) 앞까지 차오른다. 호(湖)의 서북에 대포성(大浦城)이 있었으므로 그 뜻을 따서 대포〔大浦 또는 한개목〕라 명칭하였다.(水軍萬戶가 駐屯하였다)” 10) 라 하였다.




2. 대포명칭(大浦名稱)의 변천


山城浦(산성포) <世宗4年(1422)>   →   浦(양양포) <世祖13年(1467)>   →   大 浦(대포) <成宗21年(1490)>



1) 산성포(山城浦)


『세종실록』에 의하면 세종 4년(1422)에 사헌부에서 계(啓)하기를 전 판정주목사(判定州牧事) 변처후(邊處厚)가 일찍이 양양(襄陽)에 군수(郡守)로 있을 때에 비리와 관련해서“경내 낙산사의 진수정 염주 21개를 비밀리에 사고 또 경내(境內)의 산성포 만호(山城浦萬戶) 이양수(李養脩)에게 소금을 청하여 면화(緜花)와 닥나무[楮]를 바꾸었습니다. 11) ”라는 대목에서 산성포(山城浦)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데 낙산사의 경내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세조 8년(1462) 병조에서 "강원도 산성포(山城浦)는 즉 포구(浦口)에 모래가 메워져서 배가 드나들 수 없고 정박(定泊)하기가 어려우며, 연곡포(連谷浦)는 포구에 암석이 많아서 역시 배를 정박시키기가 어려우니 만호(萬戶)를 두기가 마땅치 못하고,(중략) 청컨대 산성만호(山城萬戶)·연곡만호(連谷萬戶)를 없애고 울진·삼척에 만호를 두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12) 라고 했다. 위의 자료에서 보았듯이 산성포(山城浦) 란 명칭은 세종 4년에 처음으로 등장하였다가 세조 8년에 혁파(革罷)되었다.



2) 양양포(襄陽浦)


『세조실록』세조 13년(1467)의 기록을 보면 안인포는 해문이 광활하게 통하고 또 수심도 배를 정박할 수 있는 곳으로 개선되었으나, 강릉은 거주하는 인구가 많아서 연곡(連谷)·양양(襄陽) 두 포(浦)를 개선하여 선군(船軍)과 강(江)의 선소(船艘)를 다시 설치하고 만호(萬戶)가 수어(戍禦)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따랐다. 13) 라고 하였다. 여기서 세조8년의 산성포는 세조 13년의 양양포와 동일한 곳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세조 14년(1468)의 기록에 의하면 병조(兵曹)에서 강원도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의 계본(啓本)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강릉의 안인포(安仁浦)는 삼척(三陟)과 고성(高城) 사이에 있어, 해구(海口)가 통활(通闊)하며 병선(兵船)이 정박할 만합니다. 강릉은 거주하는 인구가 조밀하여 왜구(倭寇)가 있을까 염려되니, 청컨대 일찍이 혁파(革罷)한 연곡포·양양포 두 포의 선소(船艘)과 수부(水夫)를 안인포에이속(移屬)하고 만호(萬戶)를 차견(差遣)하여 방어를 굳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4) 라고 하였다. 이 자

료를 통해 세조 8년의 산성포가 세조 14년에 기록된 양양포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일찍이 혁파한 포(浦)는 양양지역에서는 산성포(山城浦)가 유일하다.



3) 대포(大浦)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면 진보(鎭堡)와 관방(關防)인 대포영(大浦營)은 양양 동쪽 12리에 위치하며, 조선 성종 21년(1490년)에 강릉 안인포(安仁浦)에서 양양으로 옮겼다. 15) 『鄕土誌』에는 인조 4년(1626) 병인(丙寅)에 방위지(防衛地)가 못 된다고 혁파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일각에서는 1605년(선조 38년) 을사포락(乙巳浦落) 때에 군항의 기능이 마비되어 혁파한 것으로도 보고있다. 16)

지금으로부터 180여 년 전인 조선 순조 34년(1834)에 김정호가 제작한〈그림 4『〉청구도』에는 대포(大浦)의 위치가 남대천 하구로 표기되어 있다. 김정호(金正浩)가 제작한 지도내용을 살펴보면 대포(大浦)를 중심으로 서쪽으로 양양도호부 위치가 표기되어 있고 북쪽으로 낙산사 오봉산(五峯山)이, 남쪽으로 동면(東面)의 쌍호(雙湖)가 각각 표기되어 있다.

〈그림 5『〉대동여지도』에는 대포(大浦)의 위치가 남대천 하구 북쪽 방면의 양양읍 조산리가 아니고 남대천하구 남쪽 방면인 손양면 오산리 부근으로 옮겨 그려져 있는데, 현 대포영지가 남대천 하구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것을 감안한다면 착오로 보인다. 그러나 남대천 하구에 위치하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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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청구도의 대포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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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대동여지도의 대포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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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최용회(남. 85세, 양양읍 조산리).면담자료(2021. 04. 16).

8) 李海朝 <峴山三十詠>第29詠納灝堂 納灝堂 在太平樓東數十步許 俯海一面 舊爲遊賞之所 堂毁未復 납호당(納灝堂)은 부의 태평루(太平樓)에서 동편으로 수십보 정도에 있다. 한 면을 굽어 바다를 보면서 예전에 유상하던 곳이나, 당은 훼손되었으며 복구되지 않았다.

第29詠 灝堂望海호당망해(납호당에서 멀리 바다를 보다)

習池與漢水(습지여한수) 남대천과 늪이 해자처럼 겹쳐진/不足一染指(부족일염지) 부족한 한쪽을 아름답게 꾸몄네./卷我黃竹簾(권아황죽렴) 내 누런 죽렴을 말아 올리고 보니/盡納滄溟水(진납창명수)납호의 끝은 큰 바닷물과 이어졌네./鯨鵬戱樽俎(경붕희준조) 영웅호걸들은 연회를 즐기는데/蟾鴉掠枕几(섬아략침궤)달 같은 계집은 침상서 노니네./時時遇槎仙(시시우사선) 때때로 뗏목의 신선을 만나서/窮河問道里(궁하문도리)물길이 얼마나 되는가 묻노라.

9) 船隻《지식백과》배. 제포(諸浦)에 관선(官船)으로 배치된 병선(兵船)·조선(漕船) 등을 가리킴 10) 襄陽文化院『鄕土誌』 1976. p.61.

11)『 世宗實錄』세종 4년(1422) 司憲府啓: "前判定州牧事邊處厚曾任襄陽時, 衙中所藏麤布九十匹, 乾魚百五十首, 鹽十斗等物來處, 不直答通 又以衙中乾魚及官中乾魚幷百五十首, 海藿四十束, 換生繭六石私用 又收巫女鍮鐵十一兩幷衙中鍮鐵, 造鍮鉢私用 又密買境內洛山寺眞水精念珠二十一枚。 又請鹽于境內山城浦萬戶李養脩, 換緜花及楮 辭連各人, 明白納招, 而處厚不承, 請收職牒鞫問 上以犯在赦前, 命勿論

12)『 世祖實錄』世祖8年 9月 14日 兵曹據都體察使韓明澮啓本啓: 江原道山城浦則浦口塡沙, 船不得出入, 泊立爲難, 連谷浦則浦口多巖石, 亦難泊船, 不宜置萬戶 蔚珍, 三陟兩浦則賊程要衝, 乃以守令兼管, 惝有事變, 則兼治水陸軍, 其勢甚難 請革山城, 連谷萬戶, 置萬戶於蔚珍、三陟 從之

13)『 世祖實錄』世祖13年 8月 24日 兵曹據江原、黃海道體察使韓繼美啓本啓: "曾革江陵安仁浦, 海門通闊, 且水深可爲泊船之處, 況江陵府 在海邊中央, 人居稠密, 請以曾革連谷, 襄陽兩浦船軍及江艘復設, 萬戶戍禦。" 從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