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35호

[향토사료] 3) 양양 남대천의 수리(水利) 이용

페이지 정보

조회 102회 작성일 2024-01-17 14:34

본문

3) 양양 남대천의 수리(水利) 이용


(1) 보(洑)의 설치 및 이용

보(洑)란 하천에서 관개용수를 수로로 끌어들이려고 수위를 높이는 역할을 하는 둑으로 된 수리구조물이다. 조선시대 전통적인 농업 용수원의 주류는 보에 의한 것이었으며, 1935년까지만 해도 남북한을 통틀어 90,514개 소의 보가 있었고 여기에서 관개되는 몽리면적은 전 관계 면적의 약 50%인 512,000㏊에 이르렀다고 한다.32)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산미증산운동(産米增産運動) 그리고 광복 후의 연이은 미곡증산 시책이 추진됨에 따라 하천 상류의 많은 부분이 저수지로 바뀌고 또 기존의 소규모 보(洑)도 대형화됨에 따라 그 수는 1995년말 현재 18,425개 소로 줄어들고 몽리(蒙利)33)면적도 109,000㏊에 불과하였다.

보는 수위를 높이고 필요한 수량(水量)을 확보하기 위해 하천의 일부 또는 전부를 가로막아 만드는 것인데 이를 보통 취입보라고 한다.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재래 보는 대부분 하천에 가로로 적당한 간격마다 말목을 박고 물이 고이는 쪽에 긴 통나무들을 가로질러 이에 기대어 돌을 놓고 그 위에 흙을 덮어 물을 흐르게 하면서 수심을 높이는 게 보통이었다.

최근의 개량보(改良洑)는 대체로 취수문(取水門)·취입보(取入洑)·토사토(土沙吐)·호안공(護岸工)의 네가지 구조물로 구성된다.34)

현재 남아 있는 보는 대부분 견고한 구조를 갖추고 있으나 과거의 전통적인 보는 대부분 홍수 때 유실되고 다음 해에 다시 축조되는 구조였다.


■ 양양남대천에 시설된 보(洑) ⇒ 1996년 현재

▷본천(本川) 14개소 : 용천아랫보(가평보), 문서수보(문서릿보), 용천웃보(가둔지보), 산재당보, 수리웃보, 내현보, 내현웃보, 도리아랫보, 도리보, 원일전아랫보, 원일전보, 어성전보, 가둔지보(내현교 바로 위), 삼바리보(내현)

▷후천(後川) 9개소 : 임천보, 북평보, 범부보, 재궁보, 공수전보, 용소보, 영덕보, 서림보, 황이보.

▷오색천(五色川) 3개소 : 송천아랫보, 송천웃보, 오가보.

 

c3.jpg


■ 가평보(柯坪洑)의 변천

양양남대천의 취입보(取水洑) 가운데 가장 길었고 몽리 면적도 가장 큰 가평보(柯坪洑)를 살펴보면서 수리시설의 변화를 엿보고자 한다.

가평보는 언제 처음 설치하여 이용하였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일제강점기에 산미증산운동(産米增産運動)으로 더욱 활발하게 이용되었다.

취수보의 위치는 서면 용천리 마을 앞인 양양읍 월리 440-7번지로, 수로(水路) 총 연장은 8.5km이다. 몽리구역(蒙利區域)은 월리, 밭밤들(남대천 변 송현리, 수여리), 금강리 뒷벌, 가평리 전 지역, 동면평(수여리 일부, 금강리 앞들) 등 40ha였다. 보의 관리는 몽리자들이 중심이 되어『양양수리조합』에서 관리를 하였다.

해방 이후에 들어서면서 용천리 앞산(행정구역상 월리) 밑에서 취수하여 월리 마을을 관통하는 수로가 너무 길어서 관리에 어려움이 가중되자 송현리 434번지 지하를 굴착(掘鑿)하여 복류수(伏流水)를 거두는 양수장을 설치하게 되었다.

몽리자(蒙利者)들이 자치적으로『양양(가평)수리조합』을 결성하여 30마력의 발동기를 시설하여 학포리까지 몽리면적을 넓혀서 농업용수를 공급하게 되었다.

이후 홍수와 노후로 사용이 불가능하게 되자 1959년에는 일제강점기 때 세운 동해북부선 철교 교각 위편인 손양면 송현리 고월산 밑 314-4번지에 양수장(揚水場)을 이전하여 디젤엔진을 동력으로 한 양수(揚水)시설 설치를 추진하여 동력 50마력 양수장을 새로이 조성하였다. 당시 이건웅(李建雄) 양양군수가 양수기지원에 적극협조하여 성공하게 되었다. 이로써 양수장 부지 내에‘군수이건웅송덕비(郡守李建雄頌德碑)’를 1967년 4월 수립(竪立)하여 기념하게 하였다.35)

양수장은『양양(가평)수리조합』에서 관리하다가 1973년에 영북농지개량조합으로로 운영을 이관하면서 현재는 전기모터로 교체되었으며 몽리면적도 동면평 전 지역으로 확대되어 몽리면적도 79ha에 이르고 있다.

지금의 양수장은 1999년에 착공하여 2003년부터 운영을 하고 있으며『손양양수장』으로 명칭을 변경하여 한국농어촌공사 영북지사에서 관리하고 있다.

또한 손양면 가평리 227-3번지에는 몽리면적 2ha규모의 가평양수장이 별도로 운영되는데 1959년에 준공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2) 양양남대천의 수운(水運)

수운(水運)은 하천이나 강의 물길을 따라 사람이나 물건을 배로 실어 나르는 운송 수단으로 교통 운수 수단이 열악한 과거에는 남대천이 수운(水運)36)의 역할을 하였다.

주로 남대천 하류 지역(송현리, 수여리, 금강리, 가평리)의 주민들이 상류 지역의 산에서 베어낸 나무로 뗏목을 만들어 운반하였으며 뗏목을 만들 수 없는 목재는 낱개로 물에 띄우고 목적지점에 하천을 가로질러 밧줄을 메어놓고 떠내려와 걸리게 하여 건졌다.

서면 송천리(松川里)에는 뱃재골〔船材谷〕이 있는데 옛날 이곳에서 선재(船材)를 생산하여 수로(水路)를 통해 오산리, 수산리 등으로 보냈다고 한다.37)



(3) 양양남대천의 제방(堤防)


■ 조선시대

임천리〔鹿門〕에서 부 앞까지 큰 제방이 있었으며 제방 위는 버드나무가 식재되어있는 대로(大路)였다. 현산에서 내려다보면 봄철에 꾀꼬리가 뼈를 짜듯 날며 울어대고 그 둑의 풀밭에서는 곱게 단장한 아낙들이 향긋한 봄나물을 뜯었으며 봄 여름 가을 대제 넘어 녹문의 풀밭에서는 소 떼들이 해지는 줄도 모르고 풀을 뜯는 광경이 눈에 가득하다고 하였다.38)


■ 일제강점기

남대천(南大川) 백여리 수원(水源)은 항상 시가의 홍수난(洪水難)을 염려(念慮)하게 되므로 1932년 남대천 제방(堤防)을 쌓았는데 1936년 병자년(丙子年) 여름 대홍수(大洪水)로 파괴되고 인축가재(人畜家財)의 손실(損失)이 막심(莫甚)하였다. 이때 연창리의 대미소(竹尾沼)도 메워졌다. 1938년에 재차(再次) 견고(堅固)한축방(築防)을 하여 수해우려(水害憂慮)가 없게 되었다.39)



(4) 양양남대천의 철교(襄陽南大川의 鐵橋)

동해북부선 철도가 1937년 12월 1일에 개통되었다. 양양역은 양양읍 청곡리 390번지 일원에 설치되었다.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기 위해 일제가 대륙철도 연결을 시도하고 있었지만 광복과 함께 중단되어버렸고, 결정적으로 노선 전체가 북한령으로 들어가면서 남쪽과의 연결 공사는 중단되고 말았다. 북한령으로 들어간 후에도 열차 운행은 계속되었으나, 6·25 전쟁의 발발(勃發)로 철도가 파괴되어 개통 13년만에 전 구간이 영업을 중지하게 되었다.

일제가 한반도 종단 동해선 철도 가운데 유일하게 단절돼 있던 양양∼강릉 구간의 동해북부선을 건설하기 위해 공사가 차질 없이 수행되면서 우리나라 동해안에서 하폭(河幅)이 가장 넓은 양양남대천에‘조선 제2철교’를 1937년 7월 9일 착공하여 1939년 7월에 가설(假設)하게 된다.40)

양양남대천 철교는 지금의 양양읍 연창리 180-11번지‘동양기계상사’가 위치한 곳에서 손양면 송현리 628-2번지 양수장 옆 교각이 있었던 곳까지 약 698m의 거리에 21개의 교각을 설치하고 교각 머리마다 갈지(之)자 형태인 지그재그로 좌우에 1개씩의 대피 철제구조물을 설치하였으며 교각 위로는 철제빔이 올려 연결하고 그 위에 레일을 깔고 가운데로 사람이 걸어 다닐 수 있도록 중앙에 20㎝정도 너비의 송판 2장을 붙여서 깔아 놓고 사람이 건널 수 있게는 하였으나 5m높이로 아녀자(兒女子)들은 현기증이 나서 건너기 어려웠다.

1944년 일제는 소위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 시기라서 철제 부족을 이유로 상판의 철제빔과 레일을 철거해 가니 철교(鐵橋)는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고 콘크리트 교각만이 남게 되었다. 이 교각은 2004년 양양군에 의해 철거되었다.

8·15해방 후 북한에서 교각 위에 철제빔만을 다시 설치하였으나 운행은 하지 못하였다. 1949년 교각(橋脚) 밑으로 새로운 철로(鐵路)를 가설하고 손양면 금강리 앞까지 시험 운행을 한 바는 있었으나 6·25전쟁기간에 국군 제1군사령부에서 철교의 빔과 레일을 모두 철거해 가면서 양양남대천 철교는 또다시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나『손양면승람지』에 의하면‘6·25전쟁 전 송현리 고월산에 올라 기적소리 울리는 양양역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굽어보면 영동 최대인 양양철교 밑으로 만폭(萬幅)의 비단 물결이 동해로 이어지는 풍광을 자아내었고, 반대로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굽어보면 양양남대천대교가 은하수를 가로지른 듯 오작교 위에서 견우와 직녀가 부둥켜안는 듯한 감회를 느끼게 하였으니 누군들 시상이 어찌 떠오르지 않았겠는가?’41)라고 남대천을 칭송하고 있다.



(5) 양양남대천의 교량(襄陽南大川의 橋梁)


■ 조선시대

월리에서 동운교(東雲橋)42)로 이어지는 곳이 조선시대(朝鮮時代) 국도(國道)였는데 그 구간을 우마차(牛馬車)가 통행할 수 있도록 섶다리를 놓고 홍수로 다리가 유실되면 배를 띄웠다 하여 남대천에 다리를 놓았던 자리를 남천진(南川津)이라 했다.

1677년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43)이 남대천을 배로 건넌 사연을 소개한다.



양주읍지(襄州邑誌) 고적조(古蹟條) 물치주시(勿淄柱詩)


조선시대 문정공 우암 송시열이 1677년(肅宗3年丁巳)에 함경도(咸鏡道) 덕원(德原) 적소(謫所)44)에서 장기(長鬐)45)로 양이(量移)46)하는 길에 양양에서 물 때문에 막히게 되었다.

갑자기 큰비를 만나 양양(襄陽) 물치촌(勿淄村)의 양민 정입(鄭立)의 집으로 달려 들어갔는데, 그 집 기둥에 끝구가 거꾸로 써진 칠언절구(七言絶句)의 물치주시(勿淄柱詩)가 붙어 있는 것을 보고 나서 남쪽으로 길을 재촉한다.

우암이 배를 타고 한수(漢水)47)를 건너는데 수세가 대단하여 물이 불어났고 배는 닻과 노를 잃고 어렵게 해구로 흘러가니 수보(秀甫)48)는 두려워 낯빛이 변하였으나, 우암은 홀로 온화하게 옷깃을 여미고 앉아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침내 다행스럽게도 배가 무사히 물을 건너 언덕에 닿았다.



물치주시(勿淄柱詩)


三傳市虎人皆信(삼전시호인개신) 세 사람이 시장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말하면 모든 사람이 믿게 된다.

一掇裙蜂父亦疑(일철군봉부역의) 자식이라도 계모의 치마 속으로 들어간 벌을 잡으려고 옷을 들추면 아비마저도 자식을 의심한다.

世上功名看木雁(세상공명간목안) 세상에 공명을 살펴보면 굽은 나무는 도끼질을 면하지만, 울지 못하는 기러기는 요리상에 오른다.

座中談笑愼桑龜(좌중담소신상구) 좌중 담소라도‘거북이와 뽕나무의 고사’49)를 교훈 삼아서 뽐냄을 삼가라!.



이 글에 대해 우암은 허암(虛庵) 정희량(鄭希良)이 쓴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권구(權絿)는 조광조(趙光祖)가 쓴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양양남대천 이외의 다리는 그 지역 주민들이 협동하여 섶다리, 쪽다리를 놓고 다녔으며 때로는 양양부사가 황장목(黃腸木) 죽데기를 나누어 주어 쪽다리를 놓기도 하였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50)이 64세가 되던 1800년 6월에 정조 임금이 갑자기 승하하고 동년 7월 4일 순조가 즉위하면서 8월 18일 양양부사로 승진하여 부임하게 된다. 그리고 정조 임금의 황장목(黃腸木)51)을 쓰기 위한 진영(鎭營)이 설치되었다. 연암부사는 필요한 황장목을 보내고 나머지 판자를 강가에 모아놓고 매년 장마기에 고충을 겪는 백성들을 위해서 황장목 죽데기로 패다리52)를 튼튼하게 설치하여 몸소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실천하였다.53)


■ 일제강점기

조선시대부터 있었던 남대천교를 없애고 일제(日帝)가 그 자리에 380여m의 섶다리(교각은 콜타르를 먹인 통나무로 하고 상판은 직경 10㎝정도의 소나무와 참나무를 베어다 깔고 그 위에 흙을 덮고 다졌다)를 놓고 트럭도 통행할 수 있는 일방통행의 다리를 놓았었다. 대홍수로 다리가 유실되면 같은 방법으로 교량을 설치하였다.

초기에는 교각을 박을 때 통나무 3개를 세워 삼발이를 만들고 네 가닥의 로프를 여러 명이 당겼다 놓았다를 반복하며 가락에 맞추어 박았다. 후기에는 발동기의 동력으로 다릿발을 박았다.54)


■ 양양남대천의 대홍수로 목교가 유실되었을 시의 응급조치

남대천 다리가 설치되었던 자리인 양양읍 월리에서 동운교 쪽 강변까지 로프를 단단하게 연결한 후 손양면 가평리에서 작은 목선을 옮겨다 놓으면 배에 오른 자가 밧줄을 당겨서 건넜다 하는데 사공이 없어 무료였다고 한다.

대교 재건이 늦어지면 임시로 사람만이 다닐 수 있도록 송판 두 쪽을 깐 쪽 다리를 설치하고 보호용 밧줄도 설치하였다55)한다.


■ 6·25 전쟁시기

6·25 전쟁 발발 5일 전인 1950년 6월 20일 북한군 탱크 20대를 기차로 양양역까지 실어 왔으며 6. 22일에는 21대 더 싣고 와서 지축을 흔들며 남대천을 건너 월리 강변 아카시아 숲속에서 하룻밤을 새우고 이튿날 새벽에 38선으로 전진 배치되었다.

미군의 폭격에도 살아남은 남대천교는 1950년 9월 30일 북한군이 고성능 수류탄으로 차량이 통행할 수 없도록 동운교 쪽을 파괴하고 후퇴하였다. 이것을 주민의 자력으로 즉시 보수하여 통행에 불편이 없게 조치하였다.

낙동강 전투에서 국군과 미군의 반격으로 경북 대구(大邱)의 팔공산(八公山)에 집결해 있던 북한군 8개 사단(지휘관 무정)이 북쪽으로 퇴각(退却)하다 선발대(先發隊) 중 일부가 10월 1일 양양에 진입하고 10월 4일 새벽에 후발대(後發隊)가 양양남대천을 마지막으로 건넌 후 폭약을 설치하고 떠나니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폭음과 함께 남대천교가 끊어지고 말았다.

다리가 없는 남대천을 차량과 중장비가 도하(渡河) 하려면 당시 수심이 얕은 지금의 월리 48-2번지 양양가족센타가 있는 곳과 한국수산자원공단 동해본부 동해생명자원센터 뒤편인 수여리 627번지 여울이 적지였지만 7번 국도와 연결이 용이(容易)한 월리 방면을 주로 이용하였다.56)

1951넌 UN군이 양양을 완전히 수복한 후 1952년 육군 건설공병단에서 현 양양읍 월리 양양가족센타 인근의 얕은 여울에 150여m의 목조 교량을 가설하였는데 다리 상판 서쪽은 인도(人道)로, 동쪽은 차도(車道)로 구축하였다. 미국산 목재로 튼튼하고 미관도 좋았다. 연창리 쪽으로는 자갈과 모래로 완만한 구배(句配)의 길을 만들었다. 1954년 9·13 수해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휴전 이후 남대천 교량가설

남대천 구교는 6·25 전화(戰禍)로 파괴된 것을 1953년 제1101야전공병단에서 3개월만에 300여m의 목교(木橋)로 튼튼하게 준공하였다.57)

1962년에는 목교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콘크리트로 완공하였다.

6·25 이후인 1953년 양양남대천교를 준공하고 수복(收復)을 기념하기 위해 제1101야전공병단에서 양양우체국 앞 사거리에 수복기념공병탑을 세웠다가 1976년 남대천교 서쪽 제방 입구로 이전하였다. 2006년 양양교 가설 및 도로 확·포장 공사를 추진하면서 현산공원(峴山公園)으로 이전하였다.58)


■ 양양남대천의 현대식 교량 건설

▷양양대교

1991년 7번국도 확·포장공사 때 현대식 교량을 가설하였는데 연창리 앞에서 손양면 송현리로 건너가는 양양의 관문으로 속초와 강릉을 연결하는 도로이다.

⇒ 교량의 제원 : 교량의 길이는 490m, 폭은 18.5m, 높이 12m, 교각 10개로 통행 제한무게가 43.2ton인 1등교로 대형차량도 통과할 수 있는 교량이다

▷낙산대교

양양남대천의 가장 하부에 설치된 교량으로 양양읍 조산리에서 손양면 가평리를 잇는 해안관광형 교량으로 2003년에 준공하였다.

⇒ 교량의 제원 : 교량의 길이는 470m, 폭은 20m, 높이 10m, 교각 7개로 통행 제한 무게가 43.2ton인 1등교로 대형차량도 통과할 수 있는 교량이다

▷양양교

양양군청에서 양양읍 남문리를 지나 월리로 이어지는 군도(郡道)의 교량으로 59번 국도로 연결되었다.

1962년 건립한 남대천교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2008년도에 건설하였다.

⇒ 교량의 제원 : 교량의 길이는 378m, 폭은 25.9m, 높이 10m, 교각 7개로 통행 제한 무게가 43.2ton인 1등교로 대형차량도 통과할 수 있는 교량이다



(6) 양수발전소(揚水發電所) 하부 저수지 영덕호(盈德湖)

한국수력원자력(주) 양양양수발전소는 후천인 양양군 서면 영덕리에 위치한 하부저수지 영덕호(盈德湖)와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 해발 937m에 위치한 상부저수지 진동호(鎭洞湖)로 이루어져 있다.

양양양수발전소는 1996년 착공하여 2006년 1∼4호기를 준공하면서 전기생산을 시작했다. 발전기 4기(호기당 25만kW)는 총 100만kW의 전기를 생산하며, 이는 국내 양수발전소 중 최대 규모이자 원자력 1기와 맞먹는 용량이다.

주요 설비로는 250MW 3상 교류동기식 발전 전동기 4기와 255.1MV의 펌프수차 4기가 설치돼 있다. 터널식 수로는 약 6km에 달하며 상부댐(총 저수량 520만 톤)과 하부댐(총 저수량 1030만 톤)의 낙차를 이용해 전력을 생산 공급한다.

물을 하부댐에서 상부댐으로 끌어올리는데 11시간 14분이 소요되고 상부에 저장된 물로 최대 9시간 24분동안 전기를 생산할 수 있으며, 오염물질이 배출되지 않는 친환경적 발전 설비다.

양수발전은 심야 잉여전력을 이용하여 상부댐으로 물을 끌어올렸다가 전기소비가 많은 시간에 물의 낙차(落差)로 전기를 생산하는 방식이다. 기동정지 시간이 짧고 부하 변동에 대한 신속한 대응이 가능하다. 또한 평상시에는 전력수요에 정확하게 대응, 계통안정에 기여하며, 전력계통 사고 시에는 ‘3분 특공 대기조’역할을 수행한다. 양양양수발전소는 상부저수지에서 발전소까지의 낙차가 819m로 동양 최대의 낙차 크기다.59)

 

c4.jpg


----------------

3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보(洑), 한국학중앙연구원, 1988~1995년.

33) 저수지나 보(洑) 따위의 시설에 의하여 물을 받음

34) 『농업수리학』민병섭, 향문사, 1978.

35) 『양양지방의 금석문』양양문화원, 2014, p.111.

36) 뱃길로 운반함.

37) 『양양의 땅이름』양양문화원, 1995, p.140.

38) 『明庵集』《峴山三十詠》, 국립중앙도서관, 이해조 양양부사, 1901.

39) 『양양의 땅이름』양양문화원, 1995, p.31. 襄陽邑由來

40) 「동아일보」1937. 7. 9일‘양양남대천에 조선 제2철교 가설 명년 준공’

41) 『손양면승람지(巽陽面勝覽紙)』양양군 손양면, 1954. 5월

42) 동운교(東雲橋) : 현 양양속초산림조합 옆 복개(覆蓋)한 도로 밑에 교각이 있다.

43) 주자학을 절대 신봉했던 노론의 영수, 1607년(선조 40) ~ 1689년(숙종 15)

44) 적소(謫所) : 귀양지, 유배지

45) 장기(長鬐) : 현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일부와 경주시 일부를 관할하던 옛 행정 구역이다.

46) 양이(量移) : 멀리 유배된 사람의 죄를 감등하여 가까운 곳으로 옮기는 일

47) 한수(漢水) : 양양남대천의 또 다른 이름

48) 수보(秀甫) : 우암 송시열의 아우 송시묵(宋時黙)

49) 신상구(愼桑龜)는 : 『송자대전』제51권「서(書)」김연지에게 답함 - 을묘(1675)년 8월 20일

50)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 박지원(朴趾源, 1737년 3월 5일~1805년 12월 10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실학자이자 사상가, 외교관, 소설가이다.

51) 황장목(黃腸木) : 임금의 관(棺)에 쓰이는 질 좋은 나무

52) 「양양의 패다리놓기」崔琳圭『아시아강원민속』강원민속학 제2권 45∼62p 1984

53) 과정록(過庭錄) : 박종채가 아버지 박지원의 신상·생활상·교우·업적·저술 등을 모아 엮은 잡록.

54) 이종우(88) 양양학연구소 고문(顧問)의 증언

55) 앞의 증언

56) 『한국전쟁시기 양양군정통치에 대한 고찰』양양문화원, 2015, p.72.

57) 앞의 책 p.73.

58) 『양양지방의 금석문』양양문화원, 2014, pp.116~117.

59) Journal of the Electrical World / Monthly Magazine 전기에너지산업 현장을 가다 : 한국수력원자력(주) 양양양수발전소

2011 December